사람들은 근본적으로 불안한 존재들이다. 항상 무엇인가에 쫓기던지 아니면 만족하지 못하고 그 이상의 무엇을 추구한다. 자신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모를 때가 있고 그 소원을 정확히 안다고 해도 언제나 ‘주체로서의 자아’와 ‘바라는 그 대상’ 가운데 자아 속 분열이 존재하고 있다. 사정은 많고 사연을 다양하지만 대개 인간의 문제는 자신이 자신을 온전히 수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반성’하는 인간의 의식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일들은 인간의 의식이 발생하는 그 순간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의 의식은 언제나 반성(反省)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순간들을 우리들은 원죄의 한 현상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렇기에 이 인간의식의 시원(始原)을 파악하였다거나 그것을 이해하는 데에 좀 더 가까이 갔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이 불안의 문제는 풀리지 않는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존재로 발견되기 원하는 것은 아마도 이러한 근원적 불안과 내면의 자기 분열 증세를 치유하는 새로운 힘과 가능성을 경험하기 때문일 것이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의 의식의 깊은 속에서 존재하는 근본적 존재구조를 변형시키시지는 않지만 그 구조를 통하여 우리들이 해야 할 바 목적을 성취하도록 새로운 역사를 이루어주시는 것이다.

선과 악의 혼재, 그늘 속에서 자라는 인간
인간을 구성하는 것은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자라나면서 많은 것을 경험하는데 특히 문화 속에서 자신을 배우게 된다. 그는 어려서부터 놀이하는 법을 배운다. 놀이를 통해 다양한 환경에 노출되고 거기서 무엇이 올바르고 무엇이 추구할 만 한 것인지 배우게 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인간은 문화의 기준이 될 수 있는 진(眞), 선(善), 미(美)에 의하여서만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선과 악은 혼재하여 있고 사탄은 이러한 처지를 교묘히 이용하여 모든 것을 혼돈스럽게 만든다. 선한 것 속에서 악이 나오고 악 속에서 선이 배태된 것처럼 보인다. 혼자 느끼고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남들과 더불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은 삶의 기본 조건이지만, 타인의 존재는 자신의 생존과 번영을 위협하는 요소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전쟁, 가난, 소외, 그리고 각종 탄압 등 노골적으로 인간 자신이 혐오스러워 지는 그런 문화도 존재한다. 유감스럽게도 어린 시절부터 세상이 사각의 정글이라는 것을 배워야 하는 아이들도 있으며, 버림받아 무엇이 참된 사랑인지, 이 세상이 아름다운 것인지 전혀 모르고 자라는 아이들도 있다. 우리들은 이런 세상을 만들어 가고 그 속에서 성장하면서 그렇게 규정된 것이 세상이라고 여긴다. 문화를 자랑하지만 그 배후의 드려진 깊은 그늘을 애써 무시하는 것이 또한 우리들이다.

하나님의 은총과 구원의 능력
우리가 기적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의 은총과 구원의 능력을 간구하게 되는 것은 이러한 우리의 환경과 문화 속에서 꺼지지 않는 희망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 문화의 생존방식과 행태를 바꿀 수 있는 새로운 비전을 우리에게 주신다.

요즈음 생태학적 연관성이나 생명에 대한 예민함이 사람들 사이에서 높아지고 있는 것은 그 징후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어 정의와 평화, 그리고 사랑의 정신을 주시므로 세계가 누구의 것만이 아니라 우리와 후손들의 것임을 깨닫게 하시고 우리가 가진 모든 것들을 미래를 위한 자산(資産)으로 바꾸도록 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을 믿는다”는 고백은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제대로 행동하지 못하고, 미래를 꿈꾸지 못하고, 지금을 변화시키지 못한 모든 결핍과 부족, 그리고 어리석음, 거룩하지 못한 모든 행태와 자신을 용서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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