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각지교회 목회와 음악가로서의 삶

1960년 목사안수를 받은 3년 후에 삼각지교회의 청빙을 받아 부임했다. 삼각지교회는 이 목사가 부임할 때에는 교세가 약했다. 구제물자(밀가루) 때문에 가난한 신자들이 모여들었는데 대부분이 용산역 앞의 옛 방공호 속에 사는 사람들과 교회 근처의 판잣집, 한강의 천막촌 사람들이었다.

이 목사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서 영적인 복, 육적인 복, 물질적인 복을 받자고 강조하면서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랬더니 십일조를 하는 사람이 생기고 그들의 생활이 점점 좋아지기 시작했다. 교회는 날로 부흥일로를 맞게 되었다.

1967년 무허가 건물철거로 신자의 70~80%가 감소되었다. 교인들은 ‘빈자리 채우기 운동’에 힘을 썼고 ‘전교인 십일조 바치기 운동’에 참가했다. 당시 이 목사는 전국으로 다니며 부흥회를 인도했다. 그래서 그 소문을 듣고 교회는 새로운 신자가 주일마다 늘어서 빈자리가 채워지기 시작했다.

적산가옥인 삼각지교회를 불하받은 후 개발지역 동부이촌동의 대지를 매입했다. 교회건물은 한국식으로 설계했다. 그 이유는 첫째, 한국의 고유미를 살리기 위해서였으며 둘째, 아파트의 큰 건물과는 대조적으로 포근하고 아담한 아름다움을 느끼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교회를 완공하고 아파트 고층에서 내려다보니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게 보여 기뻐했다. 강변교회는 대지 231평 연건평 228평이었다. 성전봉헌과 함께 교인도 장년 427명, 학생 370명으로 부흥되었다.

이중태 목사는 목회에도 홍은교회, 청주 서문교회, 삼각지교회(강변교회) 등에서 목회하면서 열성을 냈지만 그의 삶은 음악가로서 교단 음악발전에 크게 기여하는 것으로 주목받았다. 이 목사의 부친은 대농이었고 손수 퉁소를 만들어서 불곤 하였는데 그 퉁소소리가 얼마나 뛰어났던지 새들이 날아와 어깨에 앉아 끝날 때까지 듣다 가는 정도였다.

가히 신기(神技)의 경지에 이르는 퉁소제작의 명장(明匠)이며 퉁소연주의 명인(名人)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이 목사는 부친에게 대물림한 듯 음악적 재능을 타고났다. 그가 다섯 살 때 마을에서 어른들이 농악을 하는 것을 보고서 처음으로 장구를 만져보았는데, 그 ‘초연’을 양장구로 해내어 어른들의 감탄을 자아냈고 음악의 신동으로 소문났다.

이 목사의 음악인생은 1940년 서울음악전문학교(3년제)에 입학하여 당대 최고의 성악가 테너 안기영 선생에게 성악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열린다. 그런데 모처럼 음악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이 목사에게 아쉬운 상황이 벌어졌다. 일본당국이 교수들의 사상이 불온하다하여 음악학교를 강제 폐교시킨 것이다.

음악공부를 하고 싶은 열망에 당장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중앙음악학교에 입학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결국 그곳에서도 졸업을 하지 못한 채 귀국했다. 이 목사가 평택중학교 음악교사를 거쳐 천안중학교와 농업고등학교교사로서 제직하던 중 6·25가 터져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 하나님께 헌신의 서원 기도를 했다. 3년 후 서울신학대학에 입학하여 학교의 요청으로 학생신분으로 졸업할 때까지 찬송가를 가르쳤다.

그는 찬송가를 가르치는 위치에 서게 된 때부터 교회음악에 대한 사명을 본격적으로 느끼게 되었다. 그러자 당장 벽에 부딪히게 되었다. 학생들의 찬송에 대한 무관심과 교수들의 관심부족은 정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당시 성결교회는 주로 전도와 부흥에 주력했기 때문에 감리교나 장로교회에 비해 음악적으로 빈약했다.

그러나 그의 교회음악 강의에 학생들의 수업태도가 진지해졌다. 그가 신학교성가대를 조직하여 지도한 결과 유능한 성가대로 발전되었다. 교단의 중요행사 때에 성가를 담당했고 정기적으로 음악예배를 드렸다. 할렐루야, 천지창조, 메시아 등 대곡을 능숙하게 연주할 수 있도록 발전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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