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오르그 헤겔(G.W.F,Hegel, 1770~1831)이 세계 철학사 중에서 그리스 철학을 정리하는 순서가 되자 “마치 대양으로 항해를 떠났던 배가 고향의 항구로 되돌아 올 때 느끼는 안도감”을 느끼게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사실 우리들이 대양같이 넓은 신학의 다양한 주제를 탐사하다 성령 하나님을 다루는 마지막 단원에 이르면 헤겔이 느꼈던 그런 안도감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실제의 사정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성령과 연관된 신학의 마지막 장은 많은 미스테리와 어려움, 잘 정리되지 못한 어지러운 역사들을 남겨두고 있는 것이다. 비록 구원론의 지식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으나 성령 하나님에 대하여 신학적 숙고를 시작하자마자 우리는 여전히 어린아이와 같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먼저 우리의 어려움은 성령 하나님의 익명성에 기인한다. 성령은 우리에게 이름도 그 얼굴도 가리워진 은둔의 존재로 나타난다. 창세기 첫 장에서부터 하나님의 성령은 모든 것을 움직이는 원천이시지만 정작 그 자신은 보이지 않으시는 바람으로 나타나신다. 구약의 독특한 어법에서 연유한 이유도 있겠지만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은 그 본질이 밝혀지지 않는다. 단지 하나님의 구체적인 활동을 나타내며 그렇기에 밝혀지지 않은 또 다른 익명적 하나님으로서 만나지고 있을 뿐이다.

신약에서도 이런 사정은 변하지 않는다. 성령에 대한 많은 언급과 역사에 대한 소개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자기를 또렷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하나님의 가장 깊은 것을 통달하시는 분으로 소개되지만(고전 2:11) 정작 그분은 비인격적인 상징과 이미지 속에서 등장한다. 불, 물, 비둘기, 약속, 선물로 우리에게 소개되고 있다. 예수께서 육신을 입으심으로 자신을 낮추셨다면 이제 성령 하나님은 완전히 물질, 성속으로까지 낮아지신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낮추시는 성령 하나님을 믿을 수밖에 없다.

두 번째로 우리가 성령론에서 다루어야 할 주제들이 너무 역설적이기 때문이다. 즉 성령 하나님께서 가지신 신비는 단지 하나님 안의 내적 삼위일체의 신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우리 인간과 하나가 되어 자신의 존재를 완성시키시는 방식의 신비 속에 있다. 성령께서 우리를 회개하여 하나님의 존재에 참여하게 하고 그분의 분량에 이르도록 우리가 성화하도록 만드시는 분이라면, 그분은 우리를 하나님 자신의 내재적 삼위일체의 상호 교제와 상호 순환 안으로 이끌어 들여 우리가 거기에 참여하도록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성령께서는 인간의 구원을 완성시킴으로써 동시에 자신의 내재적 삼위일체의 교제를 하나님 밖에서 성공적으로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물론 하나님 아버지가 천지와 인간을 창조하시고, 아들 하나님이 십자가로 내려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죽음과 고통을 당하시면서 두 분 모두 자기의 고유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내재성에 머무르지 않으시고 자기의 존재를 경륜적 삼위일체의 사건을 통해서 인간과 역사의 영역으로 확대하신 것이며 동시에 그 다른 영역을 받아들이셨다.

하지만 창조는 종말의 새로운 창조를 내포하고 있으며, 성자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은 종말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 첫 완성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 성령 하나님이신 것이다. 즉 성령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계획하신 사건,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자신의 밖으로 나와 인간과 역사 속에서 자신의 의도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령 하나님은 자기 밖에서 자기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모두가 다르지만 다른 것 안에서 서로 다른 한분의 반복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역설적 역동성을 담으려고 할 때도 실제 그 어려움은 예상될 수 있다. 인간의 행위는 물론이고 하나님의 자기 존재 실현 안에 존재하는 자기 밖으로의 탈존적 성격은 인간의 그 어떤 말로도 표상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령의 사역은 개인의 구원과 역사의 구원을 목적으로 하면서 기독교 신학의 전 분야가 다시 연결되는 맥점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 어려움 앞에서 우리는 단지 하나님 성령께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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