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2:1~3)
아픔은 만인의 공용어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우리는 아픔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신비한 것은 아픔이 사람에 따라 서로 다른 모습으로 반응한다는 것입니다. 아픔은 보약이 되기도 하고 독약이 되기도 합니다.
베다니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약 3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그곳에는 나사로와 마르다 그리고 마리아, 삼남매로 이루어진 가정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정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의 기준에서 본다면, 오히려 이 가정은 환경이 매우 열악하다고 할 것입니다.
이 가정에는 많은 아픔과 상처가 있었습니다. 부모가 모두 세상을 떠나셨고, 이후 가정의 기둥처럼 생각되던 나사로마저도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사별의 아픔보다 더 큰 고통은 없다고 하는데, 이 가정은 그런 일을 연거푸 겪었습니다. 상처의 동굴 속에 주저 않을 만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가정은 그런 아픔들을 딛고 일어나서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아픔이 보약이 되었습니다.
이 가정에 주어진 이런 은총의 비결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과의 만남이 그 시작이었습니다. 이 가정이 처음부터 이런 기쁨을 누렸던 것은 아닙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한 후 분주하게 음식을 준비합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언니를 도와줄 생각은 하지 않고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경청합니다.
그 모습을 보고 마르다가 예수님께 신경질적인 투로 말합니다.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마리아에게 나를 도와주라고 말해 주세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는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할 것이다'.
이때만 해도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을 위해 다투는 자들이었습니다. 배려의 기쁨보다는 경쟁의 아픔이 앞섰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그들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마르다는 봉사의 일로, 나사로는 함께 앉음으로, 마리아는 가장 소중한 선물을 드림으로, 예수님을 기쁘게 섬기고 있습니다. 참으로 가슴 벅찬 감동입니다. 예수님과의 참된 교제가 빚어낸 열매입니다.
예수님과 깊이 교제하면 할수록 더욱 풍성해 지는 성품이 있습니다. 바로 상대방에 대한 배려입니다. 배려는 아픔의 치료를 통해 더욱 풍성해집니다. 아픔은 우리를 동굴 속으로 숨게 만들지만 치료는 우리를 동굴 밖으로 이끌어냅니다. 아픔이 은총의 통로가 되는 길은 도피가 아니라 치료입니다. 어떤 아픔도 예수님과의 온전한 교제를 통해 치료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삼남매 가정에 깃든 아픔을 기쁨으로 바꿀 수 있었던 비결입니다. 그 열매는 예수님께 대한 배려, 서로에 대한 배려, 이웃에 대한 배려로 나타났습니다. 아픔의 고슴도치에서 은총의 유통자가 된 것입니다. 이들이 있었기에, 베다니는 예수님께 가장 많은 은총을 받은 마을의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제 베다니는 더 이상 “슬픔의 집"(the house of misery)이 아니라 아픔을 딛고 기쁨을 누리는 집이 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