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명과 신학교육

이중태 목사! 그는 중후하면서도 인간관계가 풍부하고 폭넓은 전문지식의 목회자로, 교수로, 부흥사로, 교회음악전문가로, 교수로, 총회장으로 선교사로 평생을 일관되게 하나님의 복음을 널리 전하는데 열성을 기울인 지성 영성이 조화된 목사였다. 특히 교회음악의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교회음악을 발전시킨 공로자였다.  

이 목사가 예수님과 처음 만나게 된 것은 해방 후의 일이다. 친구 가운데 유영근이 있었다. 유영근은 북한으로 납북된 독립문성결교회의 담임 유세근 목사의 아우로서 훗날 침례교 총회장을 역임하게 된다. 유영근은 한 주도 거르지 않고 주일아침마다 찾아와 교회에 함께 가자고 권면했다.

하도 집요하게 찾아와 귀찮다는 생각에 한 번은 무안할 정도로 야단을 쳐서 쫓아 보내고서 ‘이제는 안 오겠지’ 하면서도 내심 미안한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그 다음 주일에 여전히 웃는 낯으로 함께 교회 갈 것을 권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단 지난 주일의 결례에 대한 사과의 말부터 하고 ‘성의를 봐서 오늘 딱 한 번만 같이 가겠다’며 따라갔다. 이중태는 그날 처음으로 간 교회에서 목사님의 설교를 듣다가 그만 고꾸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이후 누구보다 열성적인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가 천안농업고등학교 음악 교사로 재직하던 중 6·25전쟁이 일어났고 천안이 북한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북한군이 학교를 지켜야한다고 소집하여 출근했으나 나중에 동정을 보니 아무래도 피신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처가의 친척이 있는 아산 탕정면으로 피난을 갔다. 그런데 그곳이 공산당의 소굴인 줄 몰랐었다.

낮에는 조용하다가도 밤이 되면 사람이 죽는 비명소리가 들렸다. 당시는 기독교인이라는 것이 알려지면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었다. 기도하고 생각하다가 이때까지 바빠서 성경을 제대로 읽지 못했으니 이 기회에 성경을 보아야 하겠다고 마음먹고 매일 성경을 읽었다. 감동이 되어 붉은 줄을 쳐가면서 읽어 내려가는 데 눈물이 줄줄 흘렀다. 금방 순교를 당한다 할지라도 감수하리라는 마음까지 생겼다. “이제 이 한 몸을 온전히 주님께 바치겠습니다!”라고 서원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 목사는 하나님께 서원기도를 드렸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신학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가족의 반대로 미루다보니 어느새 3년이 지났다. 어느 날, 천안교회 담임 최창도 목사가 성결교단에 교역자가 부족하여 전수과생을 모집하는데 반년은 공부를 하고 반년은 목회할 수 있는 그런 분을 찾는다고 하니 이번 기회에 한번 용기를 내보는 것이 어떠냐고 하는 것이었다. 

며칠을 궁리하다가 “그저 시험이나 한 번 보고 오겠소.” 하고 당시 부산으로 피난한 서울신학대학으로 내려가서 응시했는데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면 이곳을 다시 올 수 없을 것 같아 집에 편지 한 장 써서 붙였다. “나는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겠소. 이대로 공부하겠으니 기도 많이 하시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고 학교에도 사직서를 보냈다.

서울신학대학에는 음악을 가르치는 교수나 강사가 없었다. 학교 측에서 그에게 ‘찬송가를 가르칠 수 없는가?’를 타진해 와서 학생 신분으로서 찬송을 가르치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다. 그렇게 강의를 하다 보니 강사료 명목의 월급이 학교로부터 나왔고 생활문제를 그런 식으로 해결하면서 졸업할 때까지 가르치는 학생으로 공부하게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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