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월요일에 L여사가 양평에 찾아왔다. 오전 10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1시간 만남을 미룬다고 다시 연락을 했다. 같이 오기로 한 아이 친구 엄마가 있는데 둘째 아이 유치원을 보낸 후에 만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양해를 구했다.
전형적인 도시 맘인 그녀는 완벽에 가까울 만큼 총명하지만 아이들 문제에서 만큼은 가끔 무너지는 모습이 오히려 사랑스러워서 나랑 가까워졌다. 마흔을 훨씬 넘긴 나이에도 여고생처럼 청순한 외모만큼 맑은 마음을 소유한 그녀는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 한때 교회에 몸담아 보기도 했고 결혼 전 다니던 회사도 유명 기독기업이었는데 어찌하여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마음 빗장을 닫아걸고 교회를 떠나게 했는지 잘 모른다.
언젠가 그녀가 교회에 대해 품고 있는 의문에 대해 내가 명확한 대답을 못해준 기억은 있다. 진리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한다면 밤새워서라도 전하겠지만 그리스도의 말씀을 가르치고 그분의 삶을 본받겠다는 교회들이 오늘 이 땅에서 무슨 짓들을 하고 있는지 하루가 멀다 하고 뻥뻥 터지는 교회 안에서의 가공할 만한 사건들이 목사인 나 자신이 이해도 용납도 안 되는데 무슨 수로 설명 할 수 있겠나?
대문 밖에는 헐벗고 굶주린 거지 나사로가 쓰러져 있는데 비대해진 자신의 몸을 제대로 못가누고 세상의 악취가 되어 냄새 풍기는 만신창이가 된 교회의 현실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도저히 자신이 없어서였다.
큰 교회가 좋은 교회이고 여자보다 남자목사가 좋은 목사라는 사대주의 사상 때문인지 시골 작은 교회의 여자목사인 나는 가끔은 얼치기 교인들에게 수모(?)를 당하기도 한다. “목사님은 교인도 몇 명 없으면서 왜 그렇게 표정이 밝으세요?” 지나던 길에 예배드리고 떠나면서 던진 어떤 타 교인의 말을 칭찬으로 들어야 할지 욕으로 들어야 할지. 내가 장사하는 사람이라면 손님이 많으면 좋지만 주의 종이 능력껏 보내주신 주님의 양 무리를 먹이고 돌보면 되지! 더 큰 교회당을 짓고 더 많은 교인들을 모아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그날 자기 아이들이 돌아오기 전에 서둘러 가느라 점심도 못 먹여 보낸 L여사에게 아직도 미안한 마음이다. 그런데 L여사와 그날 동행했던 젊은 엄마와의 만남이 자꾸 생각이 난다. 땀을 흘리며 산행을 할 때 바위에 앉아 마주치는 신선한 바람 같은 만남이었다고나 할까?
모태 신앙이고 예수를 잘 믿는다고 L여사가 하도 칭찬하기에 똑똑한 L여사를 휘어잡을 만한 호전적인 뭔가가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런 내 기대는 처음부터 빗나갔다. 그녀는 시종일관 주님 곁의 마리아처럼 우리 두 사람의 대화를 조용히 경청했을 뿐이다. 그녀가 말을 했던 건 내가 물어본 그녀 남편이 운영하는 한의원의 순 한국식 이름의 뜻을 풀어서 설명해 줬을 때와 아이들이 아직 어려서 자기는 교회 일을 제대로 못한다고 수줍게 고백했을 때 뿐이다. 좋은 신앙의 가문에서 모태신앙인으로 오래 교회 생활을 한 그녀가 한 두 마디 끼어들 법도 한데 오히려 겸손한 자세다.
아이가 유치원에서 오는 시간에 맞춰 종종걸음으로 L여사를 따라나서면서도 낯선 집에 와서 함께 마셨던 찻잔들을 굳이 깨끗이 씻어 정리해 놓고 가던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L여사가 하나님 품으로 다시 돌아올 날이 멀지 않았음을 확신 할 수 있었다. 주일날 올라온 감사헌금 봉투엔 처음 온 시골 교회를 위한 소원만을 하나님께 적어올린 그녀의 기도제목이 적혀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