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우로스! 스타우로스! “staurovs ”

하나님의 교회는 항상 ‘자기 비움’이라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이 십자가(staurovs  , 스타우로스)에 비춰져야만 희망이 있다. 그러나 현대교회는 이러한 자기반성의 모습을 점점 상실한 채 기득권을 누리는 자들의 형태만을 닮아 가고 있는 것 같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십자가형은 일반적인 사형제도가 아니었다. 초기유대교 ‘미쉬나’의 법규 해석에 따르면, 원래 유대 사회의 처형법은 돌로 쳐 죽이기, 태워 죽이기, 목을 베어 죽이기, 목을 매달아 죽이기 등이었다. 십자가형은 유대식 처형법이 아니었다. 고대 문헌에 보면 예수 시대보다 5백년 앞서 페르시아 황제 다리우스는 3천 명이나 되는 정치범을 십자가에 처형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십자가형벌을 받아들인 로마인들은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의 평화)에 대항하는 식민지 국가의 정치범이나 반란군들, 강도나 노예 같은 최하층 계급의 중죄인을 공개 처형하는 사형제도로 사용했다.

헬라어 단어 staurovs   (스타우로스, 신약성서에 27번 등장)는 ‘곧은 말뚝’ 혹은 ‘기둥’을 의미하였던 것처럼 처형장에는 이미 기둥(縱木)이 세워져 있었고, 죄인은 가로목(橫木)을 직접 짊어지고 가야만 했다. 십자가형은 수치와 모욕의 상징이었다. 죄인은 옷이 벗겨진 채 온갖 모욕을 당한 후 십자가에 매달렸다. 특히 유대인들에게는 그 자신에게나 가족에게도 견디기 힘든 모욕으로 여겨졌다.

복음서에 보면 죄인의 머리 위에는 이름과 죄목을 적은 티툴루스(titulus)를 붙이거나 목에 걸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의 티툴루스에는 ‘유대인의 왕, 나자렛 예수’라고 적혀 있었다. 이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INRI라고 하는데, “Iesus, Nazarenus, Rex Iudaeorum”이라고 하는 라틴어의 약자이다. 예수는 오전 9시(막 15:25)에 십자가에 매달려 오후 3시(막 15:33)에 운명했으니, 총 6시간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을 받았다. 그가 다른 죄수들에 비해 빨리 운명하였던 것은 납이나 쇳조각이 달려 있는 채찍을 너무 많이 맞았기 때문이다.

어떤 죄수는 길게는 3일 동안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경우도 있었다. 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십자가에 못 박힌 많은 죄수를 보았다. 내가 아는 사람이 셋이나 있었다. 마음이 너무 아파 로마장군 티투스를 찾아가 눈물을 쏟으며 내가 본 것을 말하였다. 티투스는 그 자리에서 그들을 십자가에 내려 정중히 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지인 가운데 둘은 의사에게 치료를 받다가 죽었고, 한 사람은 목숨을 건졌다”(The Life 420)라고 기록한다. 십자가에 달린 죄인들의 사인(死因)은 정확하게 말하면 심장마비다. 팔과 다리로 몸의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심장에 무리를 주기 때문이다. 이렇듯 예수는 십자가에서 수치와 모욕을 느끼며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어갔던 것이다.

당시의 사형법에 따르면, 예수는 로마의 정치범으로 죽었다. 그러나 그가 정치범으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당시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었던 이스라엘에게는 재판을 통해서 사형을 언도할 수 있는 재판권 행사가 원천적으로 봉쇄되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예수는 많은 기적을 일으키며 모든 사람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었던 위험인물로 잠정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동하여 로마 정치에 부담을 안겨줄 위협적인 존재로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복음서의 저자들과 예수를 따랐던 제자들의 해석은 달랐다. 예수야말로 이스라엘이 고대하던 메시야였으며, 구세주였다는 것이다. 조롱, 수치, 고통, 그리고 마지막으로 죽음에 이르기까지 한 인간이 짊어진 역사적 사건은 마침내 전 인류의 구원과 희망, 그리고 해방을 가져온 사건이 되었다.

참으로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으로 오셔서 세상을 위해 온갖 수모와 고통을 겪다가 급기야 숨을 거두었다는 하나님의 자기 비움의 극치가 아니던가. 이 비밀을 알았던 초대교회 성도들은 순교의 길을 가면서 까지도 ‘스타우로스’를 외치며 자기 비움의 삶을 실천했다.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새롭게 갱신되기를 원한다면 사순절이나 고난주간에만 그 사건을 되새길 것이 아니라 일상적 삶에서도 항상 자기 비움의 모습을 보여주어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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