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이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지만 부활을 말하는 종교는 기독교 외에 없다. 세상의 많은 종교들이 기독교를 모방하고 닮으려고 하지만, 기독교의 핵심인 부활만은 절대 배워갈 수 없다. 세상의 어떤 종교도 인간이 만든 종교와 사상과 철학으로는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래서 사망 권세가 다가오면 그들은 이길 힘이 없기 때문에 운명으로 받아 들이며 부활이 어디 있느냐, 말도 안 된다고 증명해 보라고 말한다. 그러나 아무리 부활이 없다고 우겨도 부활은 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 11:25~26)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그런데 이렇게 기독교의 생명은 부활임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부활 신앙을 소유하지 못하고 부활 신앙을 자꾸 잊어버린다.

2천년 전, 예수님과 3년여씩이나 동거동락하며 훈련을 받았던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서워서 문을 걸어 잠그고 벌벌 떨고 있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많은 사람들이 일본의 대지진에 이은 방사능유출사건과 중동의 민주화운동을 비롯하여 구제역과 조류독감 확산으로 두려워하고 불안해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으로 인해 죽은 사람이 미국에서만 약 20만명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같은 기간동안 미국에서 죽은 사람이 200만명이었는데, 그 중 전쟁의 공포와 두려움으로 인해 절망하여 죽은 사람이 최소한 100만명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전쟁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죽은 사람보다 절망으로 인해 심장병에 걸려 죽은 사람이 5배나 더 많았다는 것이다. 절망은 무섭다. 절망은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셨다.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나의 주님으로 믿는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에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을 수 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으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 즉 낫는 권세를 주셨다(막 16:17~18).

우리가 부활의 능력을 가진다면 우리 자신도, 이 세상도, 변화시킬 수 있는 선한 영향력을 드러낼 수 있다. 우리가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면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예수님의 죽음을 보고 실망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가고 있던 엠마오도상의 두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 그들은 변화되었고 능력이 나타났다.

그들의 마음은 뜨거워졌다. 부활의 주님이 성경을 풀어 말씀하실 때 그들의 식어버린 마음이 움직이고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주님은 미지근한 것을 싫어하신다. 얼마나 싫어하시는지 토해 내치겠다고 하셨다. 부활의 능력은 우리의 심령을 뜨겁게 변화시켜주는 능력이 있다. 부활의 소식을 듣고 가슴이 뜨거워진 제자들처럼 식어진 가슴에 성령의 불, 말씀의 불, 전도의 불이 뜨겁게 일어나는 부활절 되기를 바란다.

그들의 삶의 방향도 달라졌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마음이 뜨거워진 주님의 제자들은 발걸음의 방향을 돌렸다.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곧 바로 예루살렘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들은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달라졌다. 그들의 인생이 바뀌어진 것이다.

소망이 없이 절망하며 포기하고 좌절하고 낙담하는 오늘, 2011년 부활절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 심령이 뜨거워져서 주님의 복음을 능력있게 전하는 전도자가 되기를 바란다. 실망과 좌절로부터 희망과 기쁨의 사람으로 방향이 전환되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의 사람들 되기를 바란다. 부활의 능력은 변화의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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