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린 시절 고향집은 ‘ㄷ’형 초가집으로 중부지방의 전형적인 농가였다. 하지만 여느 집과는 달리 주일과 수요일에는 예배장소로 쓰였다. 권사이신 어머니가 그 예배를 인도하셨다. 그러다보니 우리 집은 인근에서 자연스레 ‘교회 집’으로 통했다. 그 때 어머니가 뭐라 설교 하셨는지 기억에 없지만 그 인연으로 내가 성직의 길을 걷게 된 건 확실하다. 그런 고향집이 이농 바람이 한참 불던 1960년대에 헐렸다. 가끔 고향에 가도 빈터만 바라보고 돌아설 때는 아쉽고 허전하기 그지없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나의 모교 서울신학대학 옛 건물 앞을 지날 적마다 고향 땅을 밟는 것 같은 아늑하고 포근함을 맛보곤 했다. 헌데 그마저 지난해에 헐리고 말았다. 두 집은 양식이나 규모, 용도가 판이 하게 다르지만 나의 운명을 결정짓는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내게는 소중한 자산이다.

내가 서울신대에 입학하던 오십년 전에도 그 일대에서는 유일하게 고풍스런 붉은 벽돌집이었다. 세속의 만고풍상을 묵묵히 지켜보며 복음의 사역자들 양성에 사용되던 거룩한 그 집, 버티다 못해 지금은 사라졌지만  학교 강당에 대한 그리움만큼은 진하다. 그곳은 나의 정신적인 기둥이요, 영적 고향이기에 그 강당이 사라진 것은 가슴을 시리게 한다.

좌우편 선교사의 주택을 지나 자그마한 운동장을 통과하면 고즈넉한 돌계단이 보이고 거기를 오르면 학교 본관 현관이면서 강당으로 들어가는 출입구가 있다. 천장이 높은 강당은 기름걸레질 청소로 석유냄새가 배어있고 채광이 잘 들지 않아 한낮에도 음습한 기운이 가득해서 썩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그 곳에서 우리는 새벽마다 기도회를 갖느라 잠에서 막 깨어난 부스스한 얼굴이지만  반가운 만남을 반복했다. 그리고 기도의 줄을 붙잡고 무시로 엎드렸다.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할 때, 끼니를 해결할 수 없을 때, 신변에 어려움이 생겼을 때, 영적으로 흔들릴 때 거기서 기도했다. 어떤 때는 밤이 이슥하도록 애절한 목소리로 부르짖기도 했다. 그 때마다 만나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했고 첩첩이 쌓인 문제들을 해결하며 사명을 키웠었다.

강당에서는 일 년에 한두 번 부흥회가 있었다. 입학한 후 첫 번째 부흥회가 열렸을 때이다. 강사는 킨 로우 박사였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날수록 성령의 역사하심이 뜨거웠다. 교수님들은 우리를 회개의 울타리 안으로 몰아넣었다. “형제들! 회개하시오, 어떤 죄라도 하나님께 자백하고 용서를 구하시오. 그리고 이 앞에 나와서 간증하시오. 사람에게 물질로 손해를 입힌 것은 갚도록 하고 용서를 구할 것은 편지를 쓰시오”라고 하셨다.

맨 정신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주문이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그 일을 가능하게 하셨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앞에 나와 죄를 자백했다. 누구는 부적절한 이성 관계를, 어떤 학생은 도적질을, 길에서 주은 시계를 자기 것처럼 차고 다니던 걸 내놓으며 눈물을 흘리는 학생도 있었다.

남학생 기숙사는 층마다 소변기만 설치되어 있었다. 큰 볼일은 1층까지 내려가 밖으로 나가야 했다. 입학하고 얼마 안 되어 한 밤중에 설사를 만났다. 나는 엉겁결에 소변기에 그것을 처리하고 1층 세면장에서 물을 떠다가 수습하느라 고생을 했다. 그 사건을 전교생 앞에 나가 이실직고했다. 창피한 건 잠시고 소변보러 갈 때 마다 괴롭히는 죄책에서 벗어나니 홀가분했다.

나의 영적 사람은 고향 초가지붕 아래서 잉태되었고 내 영혼의 잔뼈가 굵어진 곳은 모교의 강당이다. 아직 설익은 나이에 결심한 헌신이라 가끔 흔들리기도 하고 가난을 극복하며 학업을 이어가기가 힘겨웠다. 그럴 적엔 영락없이 온갖 유혹이 내게 탈출을 종용(慫慂)하며 어디론가 내뺄 수 있도록 날개를 달아 주마고 속삭였다. 그 때마다 균형을 잡아주고 쏠림을 막아준 곳이 그 강당이다. 그곳이 아니었으면 내 인생의 궤적은 아주 달라졌을지 모른다.

독일의 낭만주의 시인인 노발리스(Novalis)는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 닿아있고, 들리는 것은 들리지 않는 것에 닿아있고, 생각나는 것은 생각나지 않는 것에 닿아있다.’고 했다. 서울신대 옛 강당은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사는 날 동안 내 가슴 안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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