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께서 신과 유사한 존재가 아니라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라는 신앙 인식은 일반적인 상식 차원에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자신만의 수호신을 간직하면서 문화의 일반 영역 안에서 다양한 신들에 대한 공적담론을 유지하던 고대시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신들의 행적과 수많은 기사들이 전해져 오고 있지만 실제 세계 안에서 역사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십자가에 달렸던 유대인 인간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초대교회는 이 기적을 “본질상 우리에게 가려진 하나님이 아들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의 계시 사건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오늘날에도 성령의 능력가운데 이러한 하나님의 계시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기독론의 핵심적이며 결정적 이해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식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계시사건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인식하기 위해서, 이 신앙적 인식이 일어나기 위해서, 우리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나야 하는가? 구체적으로 주어진 사건을 모든 인간이 이해할만한 방식으로 설명하려는 시도에서 기독론은 발생하였다. 초대교회에서 일어난 기독론 논쟁은 인간 예수를 하나님으로 이해시키기 위해 필요한 여러 논리적 근거들을 당시의 인간학적 조건에서 설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이 과정에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기독론과 연관된 교회의 이단들 가운데 먼저 에비온주의나 마르시온과 같은 다양한 영지주의적 이단들을 볼 수 있다. 이들은 비교적 단순한 이단들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는 점에서 발생한 이단들이다. 영적 존재인 하나님이 구차하게 죄와 허물의 상징인 육을 입고 인간이 되셨다는 것(가치 없는 자가 되었다는 것)도 생각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죽음을 경험해야 한다는 것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또한 이들은 인간과 신 사이에는 중간적 존재들이 있으며 이 중간적 존재들이 인간을 위한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데 굳이 신이 인간이 되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매우 상식적인 신-인 관계를 설정하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교회의 기독론은 여러 한계들과 제한점들을 돌파하는 하나님의 급진성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은 영-육의 이원론, 삶과 죽음의 이원론, 그리고 신-인사이의 이원론적 관계를 뚫고 새로운 영역을 제시하는 계시적 급진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급진성을 간직하면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현실을 보다 더 선명하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교회는 신성과 인성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설정하고자 한다. 이때 발생한 다양한 교회내적 이단들이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라오게디아의 아폴리나리우스(Apolinarius)이다. 그는 예수께서 하나님이라는 것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예수께서 신성과 인성을 가지고 있다는 두 본성론을 거부하고 오직 하나의 본성, 즉 ‘육체가 되신 신성’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과 하나가 되셔서 우리처럼 연약해지고 슬픔을 당했다는 실제적인 인간성을 약화시킨 것이다.

다음으로 중요한 이단은 네스토리우스(Nestorius)였다. 그는 양성의 구분을 지나치게 강조한 사람이었다. 비록 두 본성사이에는 그 차이가 확실하지만 또한 이 둘을 하나로 묶기 위해서는 인격이 절대적으로 큰 역할을 한다고 믿고 있었다. 역설적으로 그가 이단적인 평가를 받게 된 것은 이 신-인 사이의 통합을 말하기 위한 노력에서 비롯되었다. 즉, 신성과 인성이라는 두 본성의 철저한 이원성을 보장하고 난 후에 신성의 의지에 따라 인간성이 연합하는 차원에서 그 둘 사이의 일치를 말하게 된 것이다.

이때 두 본성 간에 교류가 발생했다고 할 수는 있지만 본질적이며 존재론적 차원에서는 이원성이 강조되어 인격의 통일성이 불확실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의심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런가 하면 다시 알렉산드리아에서 단성론자들이 발생하여 예수의 신성만을 강조하는 일면성이 다시 등장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신적 일치를 추구하는 길이 형이상학적 통찰이 아니라 우리가 경험하는 역사적 현상으로서의 계시의 인격에 대한 이해에서 새롭게 다시 솟아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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