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나미에 덕(德)은 없지만, ‘avrethj(아레테)'
세계를 발칵 뒤집히게 만드는 지진과 쓰나미가 일본에서 발생하였다. 수만의 인명피해와 함께 원전 사고로 인한 방사능 물질이 유출됨으로써 제2차 피해가 우려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일본이 비그리스도교적인 국가이기 때문에 그러한 징벌이 일어났다는 비이성적인 발언으로 무리를 빚고 있는 것이 또 하나의 아픈 현실이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 보면 일본으로 인해서 우리가 은덕(恩德)을 입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번에 일어난 일본의 대지진의 근원은 지구의 판구조운동으로 인해서 생긴 것이다. 지구는 17개의 판구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판과 판이 만나면서 아래위로 서로 엇갈리며 무수한 지진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일본의 경우 크게 네 개의 판이 만나는데, 태평양판, 필리핀판, 북미판, 우리나라가 속해 있는 유라시아판이 그것이다. 그 가운데 태평양판과 북미판이 충돌을 하면서 히로시마 원폭의 5배나 되는 엄청난 파동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번 일본의 지진과 쓰나미를 보면서 일본이 우리의 앞마당을 안전하게 지켜주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의 앞마당으로 쓰나미가 몰려오지 않도록 그들이 막아주는 담벼락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그것이 그들의 덕(德)이라고 생각한다.
고대 그리스사람들은 덕(avreth, 아레테)을 인간의 탁월함, 훌륭함이라고 생각했다. 덕(virtue)은 사람으로서의 ‘훌륭한 상태' 즉 사람 구실을 하는 활동이나 이를 하게끔 된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소크라테스는 사람답게 해주는 기능을 이성(logos)이라고 했으며, 플라톤은 지성 혹은 정신(nous)이라고 생각했다. 좀 더 포괄적으로 말한다면 덕이란 철학적 지혜, 통찰력처럼 지적인 훌륭함(덕), 절제, 너그러움과 같은 윤리적인 훌륭한 덕, 인격적인 훌륭한 덕(ethos)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덕은 습관이나 습성을 통해서 성취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의 훌륭함은 아레테로 인해서 그 사람이 훌륭하게 되고 또 그 아레테로 인해서 그가 자신의 할 일을 잘 해는 그런 습성 내지 굳어진 상태"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러한 훌륭함(덕)은 궁극적으로 중용을 목표로 한다.
‘아레테’는 영어로 ‘goodness’, ‘excellence’로도 번역할 수 있다. 그에 대한 반대말은 ‘카키아’(kakia)인데 나쁜 상태, 무지 즉 사람 구실을 제대로 못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사람으로서 훌륭함은 사람구실에 대한 앎이, 더 나아가서는 사람 구실을 할 줄 아는 앎이 있어야 실현할 수가 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다(gnonai heauton).
그리스 철학에서는 자신의 영혼(psyche)을 훌륭하게 지혜로워지도록 보살피는 것이 아레테라고 한다. 또한 아레테는 최선의 사람,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획득된 능력, ‘탁월함'을 나타낸다. 그렇다면 좋은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 자신의 탁월함과 수행능력을 통해서, 동시에 올바름을 통해서 보편적으로 인정받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이 어떤 사람을 칭찬할 때는 당연히 공동체에서 무언가 뛰어난 부분이 있어야 한다. 동료 시민에게 훌륭한 말을 듣는 것, 그것이 칭찬이 아니던가. 그에 대한 도덕적 올바름으로 일컬어지는 이른바 지혜, 용기, 관용, 절제, 정의 등이 기본적인 덕목으로 자라날 수 있는 것이다.
신약성서의 저자들은 이와 같은 고대 그리스 철학적인 덕의 개념을 차용하여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인의 덕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빌 4:8, 벧전 2:9, 벧후 1:3, 1:5, 롬 14:19, 고전 8:1, 10:23, 14:3~5). 그리스 세계에서는 공동체 내부에서 사람 구실을 잘하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을 덕이 있다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한국교회에는 그리스도인답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구실, 사람다운 구실을 잘하는 덕스러운 사람이 필요하다.
더욱이 이번 일본의 사태에 대해서 괜한 그리스도교적인 잣대로 생각하기 보다는 그들의 지리적 조건이 우리에게 덕이 되었던 것처럼 우리 또한 그들에게 덕을 베풀어야 하지 않겠는가. 재난과 공포로 인해 눈물로 지새우는 재해자들을 위로하지 못할망정 주관적 신념과 감정에 기초한 망언을 순수한 신앙적 발언으로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사도 바울이 말하지 않았던가. 건물을 세우듯 서로 사랑으로 덕을 세우라고!(롬 14:19, 고전 8: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