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 11일, 엄청난 재난이 닥쳤다. 그저 경악과 공포를 체험하였다. 엄청난 쓰나미가 일본열도를 덮쳤고 친지들의 눈 앞에서 그 이웃들은 무기력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두렵고 두려운 날이었다. 이런 참화 속에서 과연 희망을 가질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충격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라는 질문은 우리의 이러한 절실한 상황과 연관되어 있다. 돌이켜 보면 기독교는 이 쓰나미의 현실과 같은 아픔과 고통, 그리고 재앙 속에서 자라난 종교이다. 사람들이 이번 쓰나미를 통해서 삶의 공간과 터전이 흔들리는 존재의 위기를 경험하였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전 우주의 변화를 추구하던 새로운 운동의 좌절처럼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아직 부활을 경험하지 못한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신적 질서의 죽음이었고, 자신들이 바라던 하나님의 죽음이었으며, 그렇기에 거기에서부터 시선을 돌려 도망가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전 우주적 허무 그 자체였을 것이다.
이렇게 우주적 차원에서 일어난 전대미문의 위기의식이 기독교의 출발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이제 우리는 역설적으로 전대미문의 재해 앞에서도 전 역사와 모든 삶의 비극적 세력들을 뚫고 넘쳐 들어오는 하나님의 은총의 쓰나미도 있음을 잊지 말고 증거 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시냐는 참된 대답은 바로 이 흔들리는 터전에서 우리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간절하지만 장대한 사랑의 메시지인 것이다.
초대교회는 낙망과 재난 속에서 역설적으로 경험된 이 희망의 근거를 자신들이 가진 희랍철학을 배경으로 해명하였다. 덧붙여 말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경륜적 구원의 역사를 체험한 교회가 여러 가지 형이상학적 문제에 봉착하게 되는데 이는 거의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자 하나님으로 체험되면서 발생하게 되는 것이었다. 기독론은 이 모든 형이상학적 사변에 중심에 서있는 것이다.
이 기독론의 시작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초대교회가 경험한 성령의 종말론적 구원계시와 그 세계사적 의미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당시 교회는 마지막 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오셨던 아들의 계시와 성령의 체험을 통하여 자신들을 하나님의 종말론적 공동체로 체험하고 있었다.
이 종말론적 구원체험에 함축된 가장 신비로운 비밀로서 결정적인 것은 역사적으로 인간으로 나타났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셨다는 사실이었다. 이는 필연적으로 기독교만의 새로운 하나님 이해를 추구하게 되는 동기가 되었고, 당시 기독교 공동체가 알고 있던 그때까지의 유대교 신 관념과 헬라적 신 관념들과 위기를 형성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삼위일체론이 형성된 것이다.
‘참 하나님 참 인간이신 분’고백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본성상 하나님이시라는 고유한 신 개념이 교회 안에서 정통신앙으로 인정되자마자 그런데 곧 바로 새로운 질문이 터져 나오게 된다.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맞다면 이제 거꾸로 예수를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과연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이시라면, 어떻게, 어떤 방법을 통해서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죽음이 진정으로 대속적인 것이며 또한 우리의 고난에 참여한 진실한 것이어야 한다면 그는 당연히 인간이어야 한다. 그런데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라면 어떻게 그가 우리와 같은 인간일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등장했고 이는 당시 초대교회에게는 매우 치명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질문은 무수한 이단들을 탄생하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그를 해명하기 위해서 주어진 다양한 신학적 해석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신 그 복음의 의미를 풍성하고 넉넉하게 규명하도록 하기도 하였다. 다양한 영지주의 이단이나 가현설의 함정을 뚫고 이 역설적 사태, 예수께서 참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 인간이시라는 정통신앙이 452년 칼케톤 공의회에서 구현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