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함과 회복
성결교회에서 자라온 사람들은 신유란 병든 몸이 회복되는 것 뿐만 아니라 건강하게 사는 것도 포함된 의미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목회자들 역시 신유를 병든 몸의 회복뿐만 아니라 건강한 육신의 삶에 초점을 맞추어 가르쳐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병이 들었거나 사고로 인해 몸을 다쳤을 때, 몸 상태가 좋지 못하여 목회자들이 심방할 때는 안수 기도를 받기를 원하고, 또 목회자들도 자연스럽게 신유를 위한 안수 기도를 해 주곤 합니다. 그렇다면 신유란 이렇게 성도들의 육신의 건강에만 적용해야 하는 것일까요? 이 신유를 오늘 우리들의 삶에 적용하기 위하여 어떻게 해석하고, 또 적용해야 바람직할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처음 모습 찾기
교단에서는 신유를 성도들이 하나님의 보호로 항상 건강하게 지내는 것과 또는 병들었을 때에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나음을 얻은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은사는 우리 육신을 안전하게 하는 복음으로 그 근거를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이적에 두고(막 16:17~18), 누구든 병 낫기를 위하여 기도한다든가 안수하는 일은 성도들과 목회자들의 당연한 특권입니다. 그렇다고 의술이나 약에 의한 치료와 회복을 부정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신유는 결국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주신 건강을 잘 지키는 것과 더불어 상처가 난 육신을 신적인 이적과 더불어 의술과 의약에 의해 고침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성도들의 삶 속에서의 신유는 육신의 건강과 회복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성도들에게 신유를 이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주신 처음의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을 자연그대로 보존하는 일, 하나님께서 창조해 주신 가정을 건강하고 행복하게 유지하는 일, 하나님과 사람들과의 관계를 바르게 유지하는 일, 개인이 자신의 영혼과 정신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일도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생각해 보면 목회자들은 신유를 개인적인 의미에서만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가장 기본적으로 신유는 개인의 건강한 생활과 병을 고침 받음이라는 의미에서 먼저 설명되어야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요즘 성도들에게 영적인 부분에서의 신유와 더불어 정신적인 면에 있어서의 신유가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습니다. 바람직하지 못하고, 왜곡되고, 편협된 신앙을 가진 이단과 유사 기독교에 물들어 버린 성도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우울증이나 대인 기피증, 정신 분열증 등에 시달리는 성도들에게 영적이고 정신적인 면에서의 신유가 절대 필요합니다.
더 나아가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창조하신 가정의 원형이 오늘 성도들의 가정에도 유지되어 가정 파괴로 인해 겪는 부부들의 아픔과 자녀들의 고통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고, 더 나아가 깨어진 가정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회복되게 하는 것도 가정적인 신유라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회 역시 구조적인 문제에서부터 발생하는 사회 계층 간의 갈등, 지역 갈등의 원인을 해소하고 회복시키는 것도 사회적인 의미에서의 신유라 할 수 있습니다.
관계의 회복과 치유로 확장 되어야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신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의도하신대로 잘 보존하고 유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과 바르고 참된 관계를 유지하고, 또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진실한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것이 일차적인 신유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머물지 않고 한 걸음 더 나가 변형되고, 깨어지고, 무너진 모든 것들, 우리들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말미암아 회복되고, 치유되는 모든 은혜 또한 신유로 해석하고 가르치며 적용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신유를 단순히 병 고치는 의미로만 해석하고, 이것만을 성도들에게 가르치고 적용하게 함으로 마치 이것이 목회자들에게만 허락된 신적인 권위의 수단으로 악용하는 일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이로 인해 일어난 신앙적 부작용들은 현대인들에게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만 남길 뿐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만드신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의도대로 온전하게 보존될 뿐 아니라 회복되는 것이 오늘 이 시대의 신유라 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