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생사의 기로에 선 교회

(행 3:1~10)

2011-02-09     배덕만 목사(주사랑교회)

어느 날, 기차에서 내려 바삐 걷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반신 장애의 걸인 앞에, 한 취객이 열변을 토하고 있었습니다. “여보시오. 너무 낙담하지 마시오. 당신도 일어날 수 있소! 일어날 수 있다고!” 사람들이 그 소리에 키득거리며 지나갔습니다. 순간적으로 성전미문에서 앉은뱅이를 고치던 베드로와 요한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나도 취객 옆에서 함께 거들어야 하나, 아니면 정신 나간 사람 취급하며 외면해야 하나? 사실, 정직하게 성경을 읽는다면, 이 시대 제자의 사명은 그 취객의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현실적·과학적 판단 하에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대해, 믿음으로 도전하는 것이 제자도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중증장애인이기에 구걸로 목숨을 연명하는 걸인이 두 사도를 바라봅니다. 그들에게 한 푼이라도 얻기 위해 말입니다. 이 상황에서 세상의 반응은 두 가지로 분류됩니다. 하나는 그냥 지나치는 것입니다. 아니면 가던 길을 멈추고 주머니를 털어, 그의 깡통에 얼마를 던져넣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두 사도의 반응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걸인에게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걸인에게 준 것은 돈이 아닌, 전혀 엉뚱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그들의 반응은 전통적인 범주에서 완전히 벗어납니다. 최소한 우리는 그들의 모습에서 두 가지를 주목해야 합니다.

먼저, 베드로와 요한은 그 장애인 걸인이 다시 걸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당시의 누구도 그가 다시 걸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면서 못 걷게 된 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처지에 놓인 사람에게 주변 사람들이 해 줄 수 있는 것은 그를 거리로 데려다 주어, 그가 동냥으로 생계를 이어가도록 돕거나, 아니면 지나치다 동전 몇 푼을 던져주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두 사도는 달랐습니다. 모든 사람이 삶의 경험과 합리적 판단에 근거해서 절대 불가능하다고 결론지은 문제에 대해, 그들은 절대적 가능성을 포착했습니다. 두 사도의 위대함은 바로 이런 영적 통찰을 소유했던 것입니다. 절대 암흑 속에서 빛을,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극적인 희망을, 십자가의 죽음 속에서 부활의 싹을 보았던 주님의 영이 그들에게 함께 했기 때문에 가능한 경지입니다.

둘째, 베드로와 요한은 자신들이 걸인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걸인이 기대했던 것은 돈이었겠지요. 하지만 그들의 주머니에는 “은과 금”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알았습니다. 그들에게 있는 것, 그들만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었습니다. 가련한 얼굴로 쳐다보던 걸인을 향해, 그들은 담대히 선포했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만약 이 광경을 지켜본 사람이 있었다면, 대단히 황당했을 것입니다. 마치 하반신장애인 앞에서 “당신도 일어날 수 있소”라고 외쳤던 취객 때문에 키득거리던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그런 반응에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부르신 목적이 세상에 돈을 주는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만약 그것이 사명이었다면, 그들은 결코 예수를 따르기 위해 그물을 버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생계를 위해 물고기를 잡지 않습니다. 그들이 잡아야 할 것은 펄펄 뛰는 물고기가 아닌, 죽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어부에게 걸린 물고기는 죽음에 이르지만, 제자들에게 걸린 사람은 생명을 얻습니다. 결국, 어부였으나 제자가 된 그들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앉은뱅이 걸인을 구원합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에게 많은 것을 반성하게 합니다. 본문 속의 베드로와 요한처럼, 주님의 제자들은 세상이 불가능하다고 포기한 상황에서 희망의 빛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이 합리적 계산에 따라 내린 논리적 결론에 종교적 면죄부를 발행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은 아닙니다. 혼돈의 암흑 속에 생명의 빛을 창조하신 주님처럼, 절망의 세상 한복판에서 구원의 희망을 노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제자의 사명입니다.

또한 주님의 제자들은 돈을 구하는 세상을 향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주어야 합니다. 교회마저 걸인의 손에 돈을 쥐어주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한, 세상의 구원과 변혁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모두가 돈의 노예가 되어 영혼마저 매매하는 현실에서, 교회마저 비즈니스에 분주하여 본질마저 왜곡되는 현실에서, 우리는 세상에 예수의 이름을 주어야 합니다. 세상이 죽음의 위기에 처한 것은 돈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며, 세상이 정말 죽은 것은 교회가 예수의 이름 대신 돈을 세상에 주려 하기 때문임을 말입니다. 현재, 교회는 생사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절망 속에 희망을 보느냐, 돈 대신 복음을 주느냐, 자신과 세상의 운명이 달린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