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은 무엇인가 II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왼손, 숨겨진 준비

2011-01-12     황덕형 교수(서울신대)

신묘년 새해가 밝았다. 그런데 이 희망찬 시간에 악의 문제를 기술해야 하는 곤혹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개인적으로 이 곤혹감이 1월 1일, 한 방송에서 방영된‘얀의 홈(Home)’이 보여준 영상 감상으로 변화될 수 있었으면 한다.

얀이 보여준 지구는 갈등과 과거의 잘못으로 인한 아픔들, 도저히 풀 수 없는 악의 모순에 가득 찬 결과들이 있어도 지켜야 할 소중한 자산이 있고, 생명의 풍요로움과 자연의 아름다움들이 함께 섞여져 있는 그 무엇이었다. 그는 그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으며, 그 지구를 지키기 위해 우리가 분발하여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그는 악의 실체에 접근하면서, 이 세계를 이해하고, 그렇게 악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 그의 결론은 연약한 소망의 가냘픈 끈처럼 이어져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슬픈 삶은 준동하고 있는 악과 만난다. 과연 악을 이해하고자 할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한나 아렌트의 입장
악에 대한 연구 역사에서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는 이전의 시도와는 다른 생소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전체주의의 기원’,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1951;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진부성에 대한 보고’, Eichmann in Jerusalem: A Report on the Banality of Evil, 1963; ‘폭력의 세기’, On violence, 1969 등) 그녀는 놀랍게도 악을 이해하려는 모든 시도를 포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악을 용서할 수도, 더욱이 그것을 심판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악이 발생할 경우 우리들은 단지 그것에 의해 고통 받아야 하는 수동적 위치에 놓일 뿐이다. 악에게 우리는 고통을 당할 뿐 악의 정체를 알 수 없다. 악이란 선한 가능성들이 완전히 소진되고 그 속에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순전한 폭력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 악은 일반적 상식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그들만의 고유한 법칙과 생존방식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이 악을 선의 결핍(privatio boni)이라고 표현한 것은 악의 현실을 과소평가한 것이다. 악은 악만의 고유한 내적 증식력을 갖고 있다.

악은 그 어떤 합당한 이유를 갖고 있지 않는 실제적인 폭력이며 존재의 강탈이고, 무질서의 난폭한 출현인 동시에 이런 것들과 무의미의 끝없는 재생산이다. 그렇기에 악은 우리의 일상적 생활공간의 모든 형태 속에, 삶의 구체적인 모습 그 어디에서도 죽음의 저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칼 바르트의 ‘무성’의 개념
칼 바르트(Karl Barth, 1885~1968)는 한나 아렌트에서 신학적으로 부족했던 면을 무성(無性, das Nichtige)의 개념을 통해서 보충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악이란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선택하지 않은 가능성, 즉 불가능한 가능성(unmgoegliche Moeglichkeit)이다.

이는 두 가지를 말하는데 먼저 악은 아렌트가 생각한 것처럼 존재에 기생해서 사는 또 다른 시스템(system)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즉, 악은 이 세계의 가장 낮은 단계의 다른 긍정적인 존재들이 가지고 있는 자기 자신의 고유한 존재원리와 영토를 갖고 있지 않다. 한마디로 악은 무(無)로서 경험되는 것이다.

둘째로 비록 악이 그 자신만의 고유한 존재원리를 갖추지 못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악은 실제적인 죽음의 세력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죽음에 대한 정확한 인식은 하나님의 은총이 자신의 구원을 성취하기 위해서 극복해야 할 부정적인 대칭적 현상들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르트에게 이 죽음의 세력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알려지고 극복 될 수 있는 허무의 세력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무성은 일반적으로 생각된 존재론적 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의 생성에서 드러나는 신학적 무성이었다.

이는 무엇을 목표로 하는가? 악은 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을 기대하고 그것의 현실을 나타내도록 허락받은 하나님의 도구라는 성서의 메시지를 목표로 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악은 우리가 하나님을 기대하고 그에게 의지하도록 만드는 하나님의 또 다른 준비이며 하나님의 또 다른 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