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목숨 건 할례- 진정한 길갈

(수 5:2~9)

2011-01-05     이태곤 목사(당진중앙교회)

여호수아서 5장에 요단강을 건넌 이스라엘 백성이 할례를 행했다는 말씀이 오늘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넜으니, 이제 이들이 있는 곳은 적진입니다. 전쟁을 알리는 나팔이 언제 울릴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할례를 행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미의 관심사는 이제 곧 시작될 전쟁을 어떻게 수행할 것이냐 하는 문제였는데 하나님의 관심은 할례에 있었습니다.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된 징표입니다.

앞에서 요단강을 건너기 직전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때도 하나님께서는 강을 건널 수 있는 방법을 일러주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성결케 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수 3:5). 하지만 이번에는 그보다도 한 차원 더 업그레이드 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전쟁을 앞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할례를 받으면 어떻게 전쟁에 임하란 말입니까? 가나안 정복 전쟁을 수행하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혹시 가나안 족속이 기습이라도 하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창세기 34장에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세겜이 야곱의 딸 디나를 겁간하고 결혼을 얘기했을 때, 그의 오라비인 시므온과 레위가 자기들은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과는 통혼할 수 없다고 하여 먼저 할례를 받게 한 다음에 그 마을 거민을 전부 죽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할례를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이때의 할례는 건성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담보로 하고서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저는 굳이 강권하여 세례를 받게 할 마음이 없습니다. 단지 교회에 등록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안 된 사람에게 세례를 강권하는 것은 잘하는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할례는 아브라함 때부터 지켜지던 하나님의 백성된 징표였습니다. 하지만 광야 생활을 하는 동안 그들은 할례 없는 백성으로 살았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구름 기둥, 불 기둥을 따라서 계속 행군해야 했기 때문에 할례를 받지 못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본래 할례는 생후 8일만에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행군에 지장이 있지는 않습니다. 생후 8일인 아이는 어차피 누워서 지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이 할례 없이 지낸 이유를 가데스바네아 사건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때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를 거부했다가 광야로 내몰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를 스스로 거부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백성된 징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앞에서 여호수아가 여리고로 정탐을 보내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쟁을 앞두고 적진의 동향을 살피는 것은 병법의 기본입니다. 그러면 가나안 족속들도 이스라엘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앞에서 요단이 갈라졌음을 알고 이미 마음이 혼미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가 자기들이 알지 못하는 이상한 종교 의식(할례)을 행한 것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때가 가나안 족속들에게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시므온과 레위가 세겜 거민을 학살했듯이, 기습 공격을 하기만 하면 자기들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일거에 몰아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빼고는 도무지 설명이 되지 않는 대목입니다.

2절에 보면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라는 말로 할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1절에는 겁에 질린 가나안 거민들의 모습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공포에 사로잡힌 가나안 거민들이 이미 전의를 상실했을 때 할례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정확한 때 역사하시는 분이기도 하고 또한 인간들의 마음을 움직이기도 하시는 분입니다.

하여간 이스라엘로서는 이때의 할례가 목숨을 건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이스라엘에게 애굽의 모든 수치를 제하여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담배를 끊는 것조차도 쉽지 않다고 하는데 하물며 죄의 종으로 지내던 부끄러움을 청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당연히 그 일에 생명을 거는 결연한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세례받은 성도의 결연한 신앙의 여정에도 진정한 길갈이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