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惡)과 신정론(神正論) I-누구를 위한 변명인가?
악이 무엇인가? 인간의 고통은 무엇인가? 이렇게 묻는다면 무척이나 추상적인 질문 같다. 그러나 인간의 잔혹사를 그린 영화의 한 장면을 생각해보면 우리가 묻는 질문의 실체를 알게 된다. 그 영화에서 한 어린이는 유괴되어 잔인하게 토막 살인되고 사설탐정은 그것을 찾아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신(神)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한 것이다.”(그는 ‘신이 없으니까’라는 인식이 깔려있다. 신이 있었다면 그렇게 끔직한 일을 허용할 이유가 무엇인가? 라고 반문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현실이 영화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는 데에 있다. 이 현실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누구를 위해, 생각해야 하는가?
고전적인 신학은 이 고통스러운 악의 문제와 만날 때 언제나 두 가지 전제를 가지고 만났음을 보게 된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또한 선하시다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이 두 전제는 ‘만약 우리가 믿는 그분이 우주의 창조주이시며 구원자이시라면 세상이 아무리 난처한 폭력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포기되어서는 안된다’는 신앙을 의미한다.
하지만 우리가 알듯이 인간의 잔혹사가 펼쳐지는 역사의 현실은 고상한 이런 신학적 전제와는 전혀 맞지 않는다. 이 상황에서 고전적인 신학은 무엇을 하였는가? 그렇다면 소위 신정론은 무엇인가?
근대에 들어 라이프니츠(G. W. Leibniz,1646~1716)와 헤겔(G.F.W.Hegel, 1770~1831)은 각각 모나드(monad)의 예정조화이론이나 절대정신의 현상학을 통하여 ‘악도 전체적으로 볼 때에는 선을 위한 봉사’라는 형이상학적 해결책을 모색하였다.
고전적인 신학은 이유없는 고통과 이해할 수 없는 폭력을 경험하는 인간을 위로하기 보다는 먼저 하나님의 존재를 변명하기 위한 가능성을 찾았다고 말할 수 있다. 악의 현실 앞에서도 하나님의 존재를 여전히 타당하게 만들기 위해서, 역설적으로 악의 현실을 하나님으로부터 단절시키는 전략을 쓴 것이다.
모나드의 개별적인 성질이나 역사의 발전이 갖는 소외의 형이상학적 설명들은 역사 내의 부패와 타락 그리고 무상함의 원인들을 ‘피조물의 자기 한계 안의 유한성’에서 찾도록 만든 장치이다. 즉 지금 여기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재난과 고통의 원인을 철저히 피조물에게서 찾음으로 하나님과 악과 직접적 연관관계가 없게 만든 것이다.
돌이켜 보면 이 거대한 재난에 대하여 하나님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 오히려 우리가 경험하는 악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으로서 죄에 대한 심판으로, 아니면 교육적 효과를 이루기 위한 도구적 요인이라고까지 적극적으로 이해하게 된 것이다. 다만 아우쉬비츠의 경험이후 이런 해석은 진부해지고 말았다는 것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신정론의 형식적 과정과 유사하지만 보다 더 신학적인 방식으로 악의 문제에 다가가는 또 다른 가능성은 어거스틴(354~430)이 보여주었다. 그에게 있어서 악(malum)은 근본적으로 창조의 원 질서가 타락한 상태 혹은 왜곡된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 유한하고 무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피조물을 사랑하는 상태에 빠진 것과 동일하게 받아들여졌다.
결국 악이 죄의 형태와 결과로서 나타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스스로 자기를 높이려고 할 때 그는 무와 만날 수밖에 없지 않는가? 인간이 고난 가운데 있는 것은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은 인간의 자기 잘못에 기인한다. 악에 대한 모든 책임은 그래서 철저하게 인간에게만 부여되었다. 어거스틴은 악은 바로 인간들이 이 악을 바라고 있는 최종적 의지이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놀랍게도 악의 원인을 무의지의 의지에서 찾으려는 어거스틴의 인간학적 설명은 자크 라캉(J. Lacan, 1901~1981)의 ‘욕망에 의한 인간이해’에 의하여 뒷받침 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이며 이는 악의 문제가 인간의 허무한 욕망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악은 죄와 한 고리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면 악과 죄가 설명될 수 있는 곳은 어디인가? 어떻게 악과 죄가 인간의 언어 가운데 들어오고 또한 우리에게 이해될 수 있게 되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