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예정(III), 궁극의 신비
하나님의 자기 결정
예정이 이해되었던 다양한 역사 속에서 칼뱅의 위치는 무엇이며 그는 예정을 어떻게 보고자 하였던가? 개신교에서 예정론을 고유한 신학적 논리로 만들었던 칼뱅은 예정에 대하여 매우 고심하였던 흔적을 남기고 있다.
초기 그의 강요의 첫판(1536)에서 예정론은 교회론의 자리에서 나타나지만, 이후에는(1537) 그리스도론 다음 구원론적 질문 속에서 등장한다. 1539년 로마서 주석이 끝났을 때 예정론은 선명하게 구원론의 마지막 항목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그러다가 1559년 최종판이 나왔을 때 다시 변화하는데 구원론의 자리에 남아있지만 예정론을 따라 펼쳐지던 섭리론이 별도로 떨어져서 이제 그 섭리론은 신론과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Ford Lewis Battles가 보여주듯이(Analysisi of the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of John Calvin, Michigan: Grand Rapids, 1980) 이러한 변화는 섭리론과 예정론을 서로 상호 작용하도록 함으로써 예정론의 의미를 더 깊게 해 주었다. 즉, 예정론이 신론의 입장에서 한 번도 다루어진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신론과 구원론사이의 공명의 효과를 가지게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강조하면서 그에 상응한 인간의 절대적 겸손을 요청하고 종국적으로는 무지의 지(docta ignorantia)의 태도야말로 이 구원의 신비를 만나는 인간의 유일하고 적절한 방식이 될 수 있음을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칼뱅의 해석은 당시 가톨릭교회의 구원론과 각을 이루고 있던 개신교회의 특성, 즉 구원은 오로지 하나님의 절대적 은총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지키면서 동시에 성도의 견인까지를 포괄적으로 지키고자 하는 노력임을 부인할 수 없다.
16세기 이후 급격하게 서구사회에 불어 닥친 개인의 주체성의 요구가 인간의 자유를 증진시키는 대신 그만큼 개인적 고독과 불안의 염려가 구원론적 질문으로 제시되는 바로 그 때, 칼뱅은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절대성을 그 대척점으로 삼고 그에 대한 답변을 시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예정이해는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오히려 신학적 논란거리로 변모하게 된다.
칼뱅의 후예들이 소위 도르트 신조(1618-1619; 소위 Tulip: 전적타락, 무조건적 선택, 제한구속, 거부할 수 없는 은총, 성도의 견인)에서 예정을 교리적 기준으로 삼으면서 이제 예정론을 말해야 했던 그 본래 자유의 정신과 은총의 깊이에 대한 이해보다는 하나님의 결의에 의한 기계적인 실행만이 중요한 것으로 남아있게 된 것이다.
웨슬리(1703~1791)는 이러한 예정에 대하여서는 비판적이었다. 비교적 젊었을 때 그는 예정론, 특히 무조건적 선택이라는 교리가 성경에 맞지 않는 사상이라고 확신하면서 매우 격정적으로 이를 비판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1739년 작성한 그의 설교 ‘거저 주시는 은총’에서 웨슬리는 “이 예정의 교리가 전체 기독교의 계시를 뒤엎는 것”이며 더 나아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초기 웨슬리에게 있어 예정론은 “반 기독교적인 사상”의 한 편린일 뿐이다. 물론 후기 웨슬리는 예정론과 자신의 차이가 겨우 “머리털 한가닥”일 뿐이라고 말하며 그 예정론 배후에 나타난 은총의 절대성에 대한 사상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변화된 모습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이 예정론이 인간의 책임을 제대로 드러낼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예정을 대하는 이 다양한 의견과 교파적 차이 속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이 진실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성서의 말씀들, 로마서 8장, 29절, 그리고 갈라디아서 4장 4~7절의 말씀을 예정의 다른 말씀과 비교해 볼 때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이 자신에 대하여 결정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하나님이 마지막 날에 성육신하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이라고 성서는 말하고 있다(롬 5장).
예정이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이미 창세전에 하나님이 자신 안에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결정하신 것을 증거하는 복음인 것이다. 그렇다! 예정이란 다름 아니라 무한의 시공을 가로질러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에서 알려진 하나님의 우리를 위한 자기 결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