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과 사중복음>
현대인을 위한 성결의 복음
강남에 있는 바(bar)의 어떤 유명한 호스티스가 전도를 받았다가 막상 모 교회를 가보니 교회 안에는 그녀가 몸담아 일하는 바의 단골 손님들이 많아 놀랐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사실여부를 떠나서 오늘날의 신자들의 영성(Christian spirituality)의 단면을 잘 드러내준다.
극단적인 사례이겠지만, 가정을 둔 신자가 버젓이 이중 살림을 차리고서도 교회 안에서 중임을 감당하는 일들, 교회를 맡아 목양을 하고 있는 교역자가 한 자매와 어디론가 가서 결혼예식을 하고 돌아온 일(사모는 혼절했다가 정신을 가다듬은 후, 나의 아내에게 상담을 요청해 왔다) 등등,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교회의 본질인 성결을 잃어버렸거나 성결이 퇴색한 면이 역력하다. 왜 이런 이중적인 영성이 거룩한 교회 안에 자리 잡게 되었을까? 그 이유 중에 한 가지는 강단에서 죄에 대한 책망과 회개로의 권면, 그리고 성결한 삶에 대한 권면이 사라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요한 웨슬레는 거룩한 교회와 타락한 교회의 긴장 안에 존재하는 교회는 말씀의 선포와 성례전과 거룩한 성령의 역사로 새로워지고 거룩해 진다고 말했는데, 만일 그가 말한 대로, 목회자들이 말씀을 ‘말씀대로’ 설교하고, 성례전을 ‘올바르게 집행하고’, 교회를 ‘성령의 임재와 기름부으심’안에 거하도록 영적 리더쉽을 발휘한다면, 신자들은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성결’ 상태(말.2:11)를 유지하면서 세상의 빛과 소금 역할을 넉넉히 감당할 것이다.
그런데 성결은 마음의 성결과 그것의 외적 표현인 윤리적 도덕적인 차원의 성결도 함축하지만, 더욱 중요한 차원에서 참된 성결은 사랑이다.
루터는 신자가 믿음으로 얻는 ‘딴 의’(혹은 밖에서 온 의. alien righteousness)를 기초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제 몸을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얻는 ‘타당한 의’(proper righteousness)를 가져야 참 신자라고 말했다. 같은 맥락에서 요한 웨슬레는 ‘성결’은 ‘기독자완전(Christian perfection)’이며 ‘기독자완전’은 ‘사랑’이라고 말했다.
아빌라의 성 테레사는 그녀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영혼의 성(interior castle), 곧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서 하나님과 연합(unity with God)을 이룬 자는 관상적 사랑(contemplative love)을 향해 세상으로 나아간다고 고백했다. 관상적 사랑은 우리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그분’을 순수히 사랑하며 섬기는 종교적 신비적 차원(mythical dimension), 우리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이웃에게 가까이 가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신비한 자로 바라보며' 섬기는 정치적 차원(political dimension) 그리고, 자연과의 일치와 연합 그리고 보존이라는 생명 중심적 차원(life-centric dimension)을 함축한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신자들 가운데 누가 성결한 자인가? 또 어떻게 성결을 추구할 것인가? 그에 대한 해답은 비록 짧지만 앞의 문장에서 제시했다. 이 시대의 참 성결은 속세를 떠난 은둔주의(monasticism)가 아니며(종교적인 면), 세속과 타협하고 거기에 안주하는 세속주의(secularism)도 아니며(윤리 도덕적인 면), 자기만족과 도취를 위해 하나님과 이웃과 자연을 이용하고 조종하는 이기주의(egoism)도 아니다(정신적 영적인 면).
하나님을 순수히 관상하라! 이웃을 신비한 존재로 바라보라! 돌 하나, 풀 한 포기도 관상하며 사랑하라! 그러면 당신은 진실로 성결한 자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