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8호> 옛 경성성서학원의 건물 철거를 보며

2010-11-10     한국성결신문

1921년에 서울 아현동 애오개 언덕에 우뚝 세워진 옛 서울신대 전신 5층 쌍둥이 빌딩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약 90년의 역사를 지닌 아현동 옛 교사는 서울신학대학이 확장 및 발전을 위해 1974년 부천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경성성서학원, 경성신학교, 서울신학교, 서울신학대학 등의 이름으로 53년 동안 수많은 성결교회 교역자들을 배출한 산실이었다.

1921년 건립 당시 명동성당, 종로 YMCA 건물과 함께 서양식 3대 건축물로 꼽힌 이 건물은 당시 동경에 있던 OMS본부가 한반도를 통해 대륙선교의 꿈을 구현하기 위해 연건평 1천여평의 5층 건물로 설계한 획기적인 대망의 교육 및 선교의 전당이었다. 동시에 이 건물은 강당과 강의실, 사무실과 기숙사, 식당을 고루 갖춘 서양식 구조의 학교 건물로 당시 아시아에서도 보기 드문 근대사적 가치와 건축학적으로도 의미가 큰 역사적 건물이었다.

한국 근대사의 흐름 속에 민족과 애환(哀歡)을 함께 한 아현동의 교사였다. 일제치하의 감시와 사찰에서도 굴하지 않고 교수들의 열정과 학생들의 사명의식 고취로 수업 때는 아멘의 연속이었고, 강당의 예배 때는 박수와 함께 감격스런 찬양과 아현동 일대가 떠들썩할 정도로 통성기도의 소리가 드높아 민족복음화의 꿈을 불태웠다. 

하지만 일제의 말기에는 강제 폐교가 되어 이곳에 영적 진리와 거리가 먼 무도한 일제의 황도건양회(皇道建陽會)가 들어와 민족의 정신을 훼손하는 본부가 되었으며, 해방의 기쁨과 감격도 잠시, 1950년에 북한의 남침으로 일어난 6.25 전쟁으로 3개월 동안 소위 ‘민주대학’이란 간판이 붙어 공산주의 사상가를 양성하는 강도의 굴혈로 변하는 상처도 입었다.

또한 서울신학대학이 부천으로 이전한 후, 이곳은 ‘새마음운동’의 본부, 명지한방병원 등으로 사용되다가 다행히 1998년 아현교회가 매입하여 지금까지 교육관으로 사용해 왔다. 그러나 2013년 아현교회 창립 100주년을 맞아 기념교회당을 신축계획 중, 2007년 서대문구청으로부터 건물의 안전진단 및 내진보수를 수차례 요청하자, 교회는 막대한 수리비용 및 이전복원 비용과 건물의 안정성 등을 고려, 철거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총회에 보고했다.

이에 총회는 임원과 관계자들로 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오랜 협의 끝에 보존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아쉽지만 철거하도록 결론을 내렸다. 그러면서 옛 건물의 머릿돌과 돌계단, 벽돌 등을 보존할 수 있는 역사관을 서울신대 구내에 만들어 사적을 보존하기로 했다. 하지만 한국성결교회의 가장 오랜 건물이고 유적이기 때문에 철거에 대한 아쉬움이 높다. 이에 대해 서울신대 박명수 박사(교회사)는 “이 건물은 성결교회의 수많은 교역자를 배출한 서울신학대학교의 영적 뿌리이며 상징이다”며, 진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지난 10월 25일 이 건물의 철거 소식에 이곳에서 배움을 닦았던 원로급 목회자 40여 명이 아현교회에 모여 기도회를 갖고, 각자 옛 기억을 더듬으며 회고담을 통해 감회에 젖은 후, 서울신학대학교의 무한한 발전을 기원했다. 이 건물의 철거로 성결교회의 103년의 역사 속에 50년이 넘는 역사적 건물이 이제 하나도 없게 됐다. 이 건물을 이전 보존하는 일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역사는 사적을 통해 증명되고, 사적이 많은 민족이나 교회가 그 품격이 따라서 높아진다는 진실을 우리 성결교회가 깊이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