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예정(II) - 예정의 교리들
지난번 글에서 예정론이 하나님의 절대적이며 무조건적 결정에 대해 무조건적 순종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 적이 있다. 어차피 이해가 안 될 테니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태도는 하나님을 무자비한 운명의 수수께끼로 만드는 잘못된 신앙 형태를 낳을 뿐이다. 우리는 예정과 연관해서 다양한 오해들이 존재하고 또한 내적으로는 쉽게 감당할 수 없는 많은 어려움들이 있지만 예정의 신비 앞에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신비를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정을 통하여 우리는 인간의 운명이나 역사의 진행과정에 대한 수수께끼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장 깊고 내밀한 것, 그분 안의 내적 결의의 사건을 이해할 수 있는 계기 앞에 서게 된다.
그런데 우리의 이런 열정적 의도와는 달리 장로교의 핵심교리로 인정되는 예정은 역사의 발전을 통하여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발전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교회 전통에서 볼 때 예정에 대한 주요 논의는 어거스틴이 인간의 구원을 위한 실제적 원인을 하나님의 선택적 은총에서 찾으면서 시작됐다. 하지만 이 때 어거스틴은 구원받은 자를 위한 선택을 지적하면서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즉 하나님의 거부할 수 없는 은총(gratia irresistibilis)이 구원받을 자에게 예정된 것으로 해석 하였으나 그 외에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예정은 언급하지 않았던 것.
이러한 해석은 오리겐이 예정 대신 예지적 섭리론을 주장한 것에서 한 걸음 더 진보한 것이다. 오리겐은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들이 각각 선과 악을 향한 경향을 가지고 있으며 결국 각 사람이 자신의 경향대로 무엇을 선택하며, 그렇게 성취될 사건에 대한 지식을 하나님이 미리 아시고(예지적 섭리) 그에 근거해 행동하시는 것이 예정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오리겐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예지적 섭리에는 인간이 스스로 회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한 반면, 어거스틴은 은총의 절대성을 주장하면서도 그 인간의 자유를 부인한 것이었다.
중세시대에 접어들면서 구원을 위한 예정과 버림을 위한 예정이 주제로 등장하게 되고 이중예정이 논의의 중심에 서게 된다. 이 바람직하지 못한 발전의 시초는 고트샬크(Gottschalk)가 열게 되는데 그는 어거스틴의 의도를 넘어서 ‘선인은 천국으로, 악인은 지옥으로라는 것이 이미 결정됐다’는 이중예정을 주장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그의 주장은 곧바로 반대에 부딪치는데, 인간의 자유의지를 완전히 무시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모든 악의 근원으로 만드는 것 아니냐는 반문이 자연스럽게 제기된 것이다.
또한 하나님에게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시간개념이 적용될 수 없으므로 무엇을 미리 아신다거나 미리 결정하신다거나 하는 것이 적당하지 못한 것이라는 신학적 반성도 뒤따랐다. 좀 특별한 발전으로는 13세기 초 Petrus Lombardus가 거의 예외적 입장에 서는데 그는 바울서신을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아야 했던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예정 교리를 사용했고 그때 예정이란 ‘은총을 위한 준비’, 즉 은총의 수여이며 동시에 그것의 구체적인 작용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던 것이다.
전반적으로 중세시대의 다양한 논의들은 어거스틴의 예정 이해를 따르면서 거기에 인간의 자유의지가 작용할 수 있는 방식을 찾아보려고 노력한 것이다. 주로 하나님의 선재적 지식이 예정이라는 결정에 앞서서 주어지고,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들을 구원하기 원하지만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게 된다는 결과가 하나님의 선재적 지식 속에 이미 알려지므로, 하나님은 그 지식에 따라 사람들의 운명을 예정할 수밖에 없다는 식의 이해가 주된 것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새롭게 변화된 환경에서 우리가 아는 이중예정이 종교개혁의 2세대에 속하는 칼뱅에 의하여 주어진다. 칼뱅이 만나는 환경은 15세기의 근대시대의 여명 속에서 일어나는 교파의 다양성과 인간 중심적 사고체계였다. 신앙을 중심으로 일어난, 그래서 개별적 신앙이 주제가 되던 시대에 당면한 새로운 문제가 칼뱅을 이중예정으로 내몰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