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라어 원어로 푸는 세상이야기(3)

항상 쇄신해야 할 그 이름! “e;kklhdi;a”(에클레시아)

2010-10-27     유복곤 박사(삼성제일교회 협동)

1517년 10월 31일, 유럽 그리스도교의 중심인 독일에서는 시끌벅적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름하여 ‘종교개혁’(reformation)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수사이자 사제였던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당시 교회의 면죄부(免罪符 indulgence) 판매에 대해 반대하였다. 루터는 그 때문에 발생한 교회의 심각한 비신앙적 행위에 대해 비판하면서 결국 95개조에 달하는 항의서를 비텐베르크 대성당에다 붙이기에 이른다. 그것이 촉발이 되어서 저항을 의미하는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즉 개신교가 탄생한 것이다.

마르틴 루터가 교회를 쇄신해야겠다고 생각한 배경에는 교회가 교회다워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신약 전체를 통틀어 114회나 등장하는 ‘교회’라는 말은 헬라어로 ‘에클레시아’(e;kklhdi;a)라고 부른다. ‘e;kklhdi;a’는 히브리어의 ‘카할’(qahal)과 동일한 개념으로서 ‘모임’, ‘집회’, ‘회중’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런데 복음서에서는 이례적으로 마태복음에서만 세 차례(마16, 18;18, 17[2회]) 언급된다. 잘 아는 바와 같이, 원래 e;kklhdi;a는 그리스에서 ‘시민의 집회’를 일컫는 말로 사용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e;kklhdi;a는 e;k(from, out of)+klhdi;a(kale;w; to call out)의 합성어로서 ‘불러 모으다’라는 뜻 즉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교회란 ‘성도 즉 하나님을 위해 구별되어 불러낸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을 율법적인 유대인들의 ‘회당’(synagogue)과 철저하게 구분을 짓기 위해서 새로운 공동체 개념인 ‘에클레시아’라는 용어를 차용했던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에 의해 소집된 모임이라는 공동체적 개념을 띠고 있지만, 매우 불완전한 공동체라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마르틴 루터도 교회의 불완전함과 비신앙적인 모습에 항거를 한 것이 아니겠는가. 영어 reformation에는 저항 혹은 항거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re-form(다시 형성한다), 다시 꼴을 갖춘다, 거듭 새로운 형태로 발전한다는 뜻이다. ‘개혁’이라는 말 대신에 ‘쇄신’(刷新)이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의 백성으로 부르신 공동체는 고여 있는 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날마다 쇄신을 해야만 한다. 마르틴 루터가 95개조의 항의서를 작성할 때 제일 첫 번째로 생각했던 것이 무엇일까? 그 항의서의 제1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우리 구주이시며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참회하라’(repent)고 말했을 때, 그리스도는 성도들의 삶 전체가 참회의 삶이기를 원하셨던 것이었다.”

교회가 날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꼴을 갖추기 위해서는 회개하는 교회, 회개하는 성도가 되어야만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는 구별되게 부르신 것이다. 명심할 것은 교회당이 새로워져야 한다거나 교회 건물이 쇄신을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쇄신이 되어야 한다. 즉 낡은 구습들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한국교회는 이번 종교개혁주일을 어떤 마음으로 맞이해야 할 것인가. 필자는 루터의 95개조 항의서 중에 94조가 눈에 띈다. “그리스도인들은 징벌, 죽음 그리고 지옥을 무릅쓰고라도 그들의 머리 되신 예수를 충실히 따르도록 훈계되어야 한다.”

설령 오늘날 한국교회가 중세 유럽의 교회들처럼 면죄부를 판매하는 것은 아니지만, 신앙을 빙자하여 그보다 더한 것을 팔고 있는 줄을 누가 알겠는가. 개혁이나 쇄신은 해년마다 그날이 돌아오면 남을 비판하고 헐뜯으면서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를 충실히 따르는 교회 공동체가 되고 있는가를 점검하고 참회를 하는 교회력이 되어야 할 것이다.

마르틴 루터의 후예라 자부하는 프로테스탄트라면 ‘오직 믿음으로만’(sola fide), ‘오직 성서로만’(sola scriptura), ‘오직 은총으로만’(sola gratia)이라는 종교개혁의 모토가 한갓 웅변으로 끝나지 말고 우리의 삶으로, 신앙의 고백으로 이어져 교회가 쇄신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어야 마땅한 일이다. 교회의 권위는 바로 예수를 닮고자 하는 참된 신앙의 힘에서 나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