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인물> 국립극장 창극단 윤석안 집사

기존 판소리 개사해 국악찬양 불러 … 문화전도사 역할 고수

2010-09-15     남원준 기자

“둥, 두~둥 주님사랑, 어허~둥둥 주님사랑, 우리 죄 대~속하신 예수님의 크신 사랑” 장구 장단에 맞춰 흥겨운 우리 가락이 예배당 안을 가득 채운다.

국립극장 창극단 단원인 윤석안 집사(도봉교회·사진)는 올해 도봉교회와 비전교회 임직식 등에서 가사를 기독교적으로 개사한 판소리 ‘사랑가’를 선보여 성도들의 눈길을 끌었다. 성도들에게 우리가락의 흥겨운 찬양은 시원한 청량감을 안겨주었다.

어릴 적부터 판소리를 좋아했다는 윤 집사는 명창이 되는 게 꿈이었다. 그러나 8남매 중 장남으로 집안 형편상 국악을 배울 처지가 아니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서야 비로소 국악하는 선배에게 ‘소리’를 배웠다. 군에서는 ‘문선대(국방홍보원)’로 활동하며 실력을 가다듬었다.

제대 후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오전부터 새벽까지 일하는 빡빡한 삶 속에서도 틈틈이 소리를 연습했다. 맹장염에 걸려 며칠 일을 못하게 되고 직장에서 해고당하는 시련은 그에게 전화위복의 계기를 맞게했다.

윤 집사는 아예 소리에 미쳐보기로 결심하고 2년여 동안 밥 먹고 잠자는 시간 외에는 연습에 몰두했다. 어둠이 깔린 늦은 저녁, 동네 근처 다리 밑에서 연습하다가 주민신고로 경찰이 출동한 적도 수차례다.

이러한 노력의 결실로 드디어 지난 92년 국립극장 창극단 오디션에 합격했다. “내가 잘해서 합격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역사하셨다”는 게 윤 집사의 고백이다.

아내 이두희 집사의 전도로 교회를 나갔던 윤 집사는 15년 동안 장로교회를 다니며 찬양봉사도 했지만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출석하던 교회의 분쟁으로 인해 도봉교회로 옮기게 됐고 ‘새신자반’에서 체계적인 성경공부를 통해 신앙인으로 거듭났다.

‘이제부터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겠다’는 소명감도 품게 됐다. 연합행사 부원으로 도봉교회 봉사를 시작한 윤 집사는 성실한 모습이 눈에 띠어 1년 만에 교회 행사를 기획하고 주관하는 행사부장에까지 임명됐다.

그의 재능은 교회뿐 아니라 외부사역에서도 빛을 발하고 있다. 개 교회 행사에서 멋진 국악찬양으로 흥을 돋우기도 하고 전문선교단의 요청으로 지방사역에 나설 때도 있다. 대전 십자군찬양단의 공연 ‘아피아가도 길에서’는 베드로 역할을 맡아 전국 순회공연에서도 도드라진 활약을 펼쳤다.

그가 신실한 신앙인으로 거듭나기까지 아내의 도움도 컸다. 윤 집사가 신앙인으로 바로 설 수 있도록 항상 옆에서 기도와 내조로 그를 도왔다. 한번은 잘 아는 선배의 요청으로 ‘절’에서 공연을 한 적도 있다. 잘 모르고 간 곳이라 할 수 없이 공연을 하기는 했지만 마음에 걸렸고 아내에게도 말을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로부터 “당신이 절에서 공연하는 꿈을 꿨다”는 말을 들었고 사람은 속여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다는 걸 그 때 깨닫고 회계했다고 한다.

몇 년 전에는 교회 차량이 노후 돼 교체해야 하는 상황에서 아내가 먼저 15인승 승합차 한 대를 헌물할 것을 제안했다. 당시 어려운 가정형편에도 은행에서 900만원을 대출받아 승합차를 구입했다. 그 후 1년 안에 대출금을 다 갚게 해달라는 기도를 드렸는데 그날 이후 윤 집사의 외부사역 요청이 물밀듯이 쏟아졌다.

결국 윤 집사는 차를 구입한지 정확히 1년 만에 대출금을 모두 갚는 기적이 일어났다.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깊이 체험했기에 신앙도 더욱 깊어졌다.

윤 집사는 더 폭넓은 사역을 준비하기 위해 최근 사이버대학을 졸업했다. ‘문화학’을 전공하고 부전공으로 ‘사회복지학’을 이수했다. 그는 이제 문화전도사로서의 사명과 소외이웃을 위한 사랑의 실천을 다짐하고 있다.   

“판소리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열심을 내려합니다. 곡도 만들고 개사도 해야 하고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찬양하고 봉사하는 행복을 매일 누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