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성결교회 상호 이해 심화
제3회 한일성결교회 역사학자 공동연구회
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소장 박명수 교수)와 일본호리네스교단 역사편찬위원회 및 ‘복음에 의한 화해위원회’, 본 교단 역사편찬위원회(위원장 김헌곤 목사)가 공동 주관한 이번 연구회에는 한일성결교회 역사학자와 역사편찬위원장 김헌곤 목사 등이 참석한 가운데 개회예배에 이어 공동 학술 발표회로 진행되었다.
첫 번째 발표에서 야스이 기요시(安井聖) 목사(일본측 역사편찬위원, 일본홀리네스교단 니시오찌아이 그리스도교회)는 ‘성(聖)교단 사건’의 원인과 의미를 새롭게 조망했다. ‘성(聖)교단 사건’은 1911년 10월 나카다 쥬지, 사사오 데츠사부로 등의 일본인 성결교회 지도자들이 동양선교회의 주요 의사결정 과정(경성성서학원의 토지구입문제)에서 자신들이 배제된 것에 반발하여 동양선교회에서 이탈, ‘성교단’으로 수 개월간 분열해 나갔던 사건으로 1917년 동양선교회 호리네스교회 설립의 원인이 됐다. 야스이 목사는 발제에서 “성교단 사건은 단지 경성성서학원의 부지 구입문제를 둘러싼 일본인 지도자와 미국인 지도자 사이의 주도권 분쟁이라는 원인을 넘어 근본적으로는 ‘양자 간 선교이념의 차이’에서 비롯된 사건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런 야스이 기요시 목사의 주장에 대해 토론에서는 “카우만 1909~1911년에 걸친 카우만의 당시 미국 순회모금은 원래 경성성서학원의 부지 구입 목적의 모금이었는데 이에 반발한 나까다 쥬지가 오히려 민족교회를 창립하고자 했던 자신의 민족주의적 열정을 보여준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박찬희 박사(기둥교회는 「활천」을 통해 나타난 한국성결교회의 초기 성결론의 내용과 입장을 재조명했다. 그는 ‘마음의 성결, 순간적 성결, 죄성 제거의 성결, 기독론적 성결, 사랑 모티프의 성결’이라는 다섯 가지 특징으로 한국성결교회의 초기 성결론을 정리하고, 이것의 현대적 적용을 제안했다.
히라노 신지(平野信二) 목사(일본 측 역사편찬위원, 화해위원회 위원장)는 1910년대 당시 일본성결교회의 지도자인 나카다 쥬지의 말을 인용하면서, 당시 일본성결교회는 일부 일본인의 가공할 폭력과 무분별한 이익추구에는 분개하고 있지만, 일본의 조선지배 그 자체에 대해서는 ‘섭리’라고 표현하는 등 매우 긍정적이었으며, 한국에 대한 일본 기독교를 ‘가나안을 정복하는 이스라엘’로 이해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박명수 교수는 먼저 ‘합병’이라는 단어 사용의 부적절함을 지적하고, 일본의 한국 병탄은 한국이 원치 않는 강제적인 행위였음을 분명히 했다. 아울러 당시 한국성결교회가 일본성결교회와의 교류를 활발히 가지지 못했던 이유는 바로 한일병탄 당시 한국인들의 반일정서였다고 주장했다.
이밖에 스티븐 더쿱 선교사(일본 OMS의 FLT 코디네이터)는 최근 40년간 이루어져 온 OMS의 선교사역을 개관했으며, 성결대학교의 배본철 교수는 “성결교회의 교단 분열이 예수교대한성결교회의 교세 변화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발표했다. ‘한국성결교회 제도의 변천 과정’에 대해 발제한 허명섭 교수(시흥제일교회)는 복음전도관으로 시작한 한국성결교회는 자체의 발전과 주변 여건의 변화에 따라 감독제와 간담회-이사회와 교역자회-이사회와 연회-이사회와 총회라는 이원적 체제로 발전해 왔으며, 이와 같은 제도의 변천은 자급 및 자치운동과 밀접하게 맞물려 있다고 주장했다.
한편 양국은 2011년 7월 4~5일 한국에서 “성결교회와 국가: 1930년대에서 1950년대까지”라는 주제로 4회 공동 연구회를 진행하기로 했으며, 최근 동북아시아의 종교상황과 관련해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한일성결교회 역사편찬위원회의 공동선언을 검토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