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중복음> 심장을 잃어버렸는가

'중생'

2010-06-26     지형은 목사(성락교회)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을 말할 때는 종종 벽에 대고 얘기하는 것 같을 수 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 곧 중생이 그렇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사람이 늙었는데, 그가 어떻게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
보라, 예수와 니고데모의 얘기가 초장부터 엇갈린다! 예수를 찾아온 니고데모는 지도자였다, 예수는 시찰 대상이었고.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를 찾아온 까닭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예수를 찾아오기 전까지 니고데모의 마음이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자신이 배워 믿고 있는 것으로는 삶의 근본 문제를 풀 수 없었다. 그러던 중에 예수란 사람의 얘기가 고민을 깊게 했다. 그 밤에 바람이 불고 있었다. 다시 예수가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에서 난 것은 영이다. …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는 듣지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니고데모에게 예수의 얘기는 절벽이었다. 종잡을 수가 없다. 율법의 진리나 신앙의 논리라면 그래도 누구보다 진지하게 살피고 배워온 터, 무슨 얘기를 들어도 주제의 끈을 잡고 얼른 큰 틀을 그리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무슨 얘기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다시 예수가 말한다. 조금만 더 설명하면 니고데모가 이해하리라 기대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나중에는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며 말한다.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이면서, 이런 것도 알지 못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우리가 본 것을 증언하는데,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

중생 곧 거듭난다는 것은 요즘 한국 교회에서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 되었다. 한참 신자가 늘어나면서 부흥회나 대형집회, 제자 훈련이나 선교의 열정이 건강하고 넉넉한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을 때는 거듭나는 체험이 어렵지 않았다. 거듭난 사람들, 그 열망 가운데 있기만 해도 깨달음이 왔고 체험이 뜨거웠다. 활활 타는 불에 나무 하나를 던져 넣으면 금방 불이 붙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요즘은 다르다. 한국 교회의 기류가 변했다. 이미 꺼져버린 조직과 제도를 관리하는 데 신경을 쓰느라 신앙의 본질이 옆으로 밀려나 있다. 경영학 얘기를 활용한 세련된 자기 계발이 설교의 주제인 경우가 상당하다. 사회 봉사에서 실패하면 교회의 사회적 영향력을 회복할 수 없다는 논리가 맞지만, 교회 사역의 본질과 사회 공익의 필요성 사이에 관계 설정이 혼돈스럽다. 세계 선교에서 한국 교회의 역할이 크지만, 교회 활동을 외부로 확장하는 데 선교를 이용하는 현실이 적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교회 신앙의 심장이었던 중생의 체험이 변두리로 밀려나 있다. 심장을 잃어버린 것 같다.

다시 성경의 언어로 돌아가자. 예수가 말씀하신 그 단순한 언어를 생각하자. 예수께서 중생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라 하시며, 자녀가 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신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요한복음 1장 12절 말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방법은 믿는 것 또는 영접하는 것이다. 이 둘은 같은 현상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그러면 둘 중에 더 쉬운 말을 골라 중생을 설명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