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위대한 사랑
(눅 19:5, 9)
“몇 년 전 간호사로 일할 때였다 아침에 출근해보니 아직 진료가 시작되기 전, 이른 시간이었지만 모녀로 보이는 스물다섯 쯤 되어 보이는 젊은 아가씨와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아주머니가 두 손을 꼭 마주잡고 병원 문 앞에 서 있었다. 업무시작 준비를 하는 동안에도 두 모녀는 맞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작은 소리로 얘기를 주고받기도 했고 엄마는 연신 딸의 손을 쓰다듬고 있었다.
잠시 후 원장 선생님이 오시고 두 모녀를 진료실로 안내했다. 진료실로 들어온 아주머니는 원장님께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얘가 제 딸아이예요. 옛날에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외가에 놀러갔다가 농기구에 다쳐 왼손 손가락이 모두 잘렸어요. 다행이 네 손가락은 접합 수술에 성공했지만 네 번째 손가락만은 그러질 못했어요. 다음 달에 딸이 시집을 가게 됐어요. 사위 될 녀석이 괜찮다고 하지만 그래도 어디 그런가요. 이 못난 어미 때문에 어린마음에 상처 많이 줬지만 그래도 결혼반지 끼울 손가락만은 주고 싶은 게 이 못난 어미바람이에요. 그래서 말인데 늙고 못생긴 손이지만 제 손가락으로 접합수술이 가능할까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숨이 막히는 듯 했다. 원장 선생님도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히 두 모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한참 후 원장 선생님은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못한 채 이렇게 대답했다. ‘그럼요 가능합니다. 예쁘게 수술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모녀도 울었고 나도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어느 간호사의 “어머니의 손가락”이라는 글이다. 때리면서도 밥을 먹이고, 엄히 나무라면서도 따뜻한 잠자리를 보살피며, 때 묻은 베개 위에 눈물 젖은 어머니의 사랑의 모순성은 진정한 사랑이요 그것만이 믿을 수 있는 사랑이다.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한 십자가를 지기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던 주님의 심정이 이렇지 않으셨을까? 주님께서 보시기에 어느 한 영혼도 애틋하고 안타깝지 않은 영혼이 없겠지만, 여리고 큰 길옆 뽕나무위에 올라가 목을 빼고 주님을 바라보는 70노인 삭개오, 일생동안 그 어느 누구에게도 따뜻한 시선 한번 받지 못했을 쓸쓸한 삭개오를 주목하신 것이다.
유대인들은 세리는 도둑질하지 말라는 율법을 어긴 자로 정죄했고 창녀들과 똑같이 취급했다. 즉 창녀들이 간음하지 말라는 율법을 범했다면, 세리들은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을 범한 자들로 유대 사람들은 그들을 절대로 상종하지 않았다.
작가 박완서는 그의 책‘자전거 도둑’에서 인간 삶에는 ‘몸이 잘 사는 삶’이 있고 ‘마음이 잘 사는 삶’이 있음을 언급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몸이 잘 사는 삶을 추구하고, 그것만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삭개오는 철저하게 ‘몸이 잘 사는 삶’을 추구해 왔던 사람이었다.
놀라운 것은 누가 예수님께 삭개오의 이름을 가르쳐드린 적도 없고, 만난 적도 없는데 예수께서 그의 이름을 부르신 것이다. 그리고 말씀하신다. “삭개오야 내려오라.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19:5, 9)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배척했고, 민중들은 예수님을 이용하려고 들었지만 그는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모했던 것이다.
짧은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일들을 경험하지만 가장 위대한 것은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 사랑 때문에 한 영혼, 한 영혼이 주님의 품안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결혼을 앞둔 딸에게 결혼반지 끼워줄 손가락을 주고 싶어하는 어머니의 사랑에 감동하고 눈물 흘리면서, 나를 살리기 위해 온 몸과 영혼을 송두리째 십자가에 못 박으신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 앞에 무디어진 우리의 마음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오늘도 십자가를 향하시는 주님의 피맺힌 사랑의 걸음은 변함이 없다. 주님의 십자가를 향한 우리의 마음이 변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