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정희의 세상읽기

동서양의 샤머니즘에서 유래된 말이긴 하지만, 2009년 대한민국은 지독한 ‘아홉수’를 겪고 있습니다. 현대사를 거치는 동안 우리에게 9에서 10으로 넘어가는 길목은 항상 힘겨웠습니다. 유신시대는 79년 부마사태 등 말기적 현상들을 겪은 뒤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사건으로 종말을 고했습니다. 89년은 민주화 열기로 심한 몸살을 앓던 해였습니다. 새로운 밀레니엄을 넘던 1999년은 Y2K라는 음산한 단어가 시대의 고갯길을 불안과 혼란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러나 2010년을 앞둔 지금은 앞서 열거한 그 어느 해보다 혼미합니다. 연초에 김수환 추기경이 온 국민의 애도 속에 생명을 다했습니다. 5월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온 국민이 충격의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러더니 김대중 전 대통령마저 하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시중에는 올해 안에 다섯 개의 별이 떨어진다느니, 남북한의 전직 지도자들이 추가로 목숨을 다할 수 있다느니 하는 흉흉한 얘기들이 떠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엄중한 시대를 지나면서 나라를 이끌던 지도자들의 죽음이 어떤 메시지를 남기는가를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김수환 추기경은 숨지기 직전 ‘고맙습니다. 사랑하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고맙습니다’는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말입니다.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생명으로 인도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것만큼 지순한 가치는 없습니다. 그러한 깨달음과 믿음이 감사로 이어집니다. ‘사랑하세요’는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말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새 계명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갑작스런 죽음을 맞으며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고 유언했습니다. 해석을 달리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크게 보면 미움과 갈등과 반목을 거두라는 뜻입니다. 재임 시절 나라가 사분오열돼 좌충우돌했지만 노 전 대통령은 죽음을 통해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문제와 해결 방법을 국민들에게 제시한 것입니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도 같은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평생 화해와 용서를 얘기했습니다. 이희호 여사도 “화해와 용서, 행동하는 양심이 남편의 유지(遺志)”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인간에 대한 사랑이 없이 진정한 용서와 화해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김 전 대통령의 일기장 제목은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입니다. 아름다운 인생과 발전하는 역사를 만드는 토대는 화해와 용서와 실천인 것입니다.
질풍노도와도 같은 현대사를 온 몸으로 견딘 세 지도자는 이처럼 한결같이 통합의 한국 사회를 소망하고 떠났습니다. 그들이 잠든 이후에도 극단적인 증오나 맹목적인 애정이 사회의 큰 목소리가 되면 보편적인 가치와, 상식이 바탕이 된 논리는 설 자리가 없습니다. 내가 하면 로맨스가 되고 남이 하면 불륜이 되는 모순의 다툼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비록 우리가 이념과 세대와 계층의 갈등이 만든 음침한 골짜기를 헤매기는 했지만 영면한 세 지도자의 유지를 받들어 서로 관용하고 화해하고 용서한다면 찬란한 통일 공화국을 우리 세대에서 이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찬 비바람을 견딘 씨앗이 따사로운 햇살과 훈풍으로 빛나는 꽃을 피우듯이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