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것은 덤덤히, 하늘의 것은 소중히

<빌 3:7~14>

2009-07-04     박상호 목사

지금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예전에 즐겨 보던 TV프로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TV는 사랑을 싣고>이고 다른 하나는 <칭찬합시다>라는 프로였습니다.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TV는…>는 주로 연예인이나 방송인 등 유명인들이 나와서 자기가 예전에 사랑했던 사람이나 존경했던 선생님, 또는 절친했던 친구 등 그리운 사람들을 찾아서 만나는 프로였습니다.

그리고 <칭찬…>는 이 사회 어느 구석에서 말없이 그야말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선한 일을 하는 사람들을 찾아내서 그들의 선행을 드러내어 칭찬해 주는 프로였습니다. 그토록 그리운 사람을 만나는 일, 또 드러내지 않고 선행을 하는 사람들을 칭찬해 주는 일은 보는 사람들의 마음에 훈훈한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마음을 더욱 끌게 만드는 것은 바로 주인공들의 표정 때문입니다. 그 표정을 보려고 그 긴 시간을 TV앞에 앉아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표정이 너무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TV는..>에서의 주인공은 긴장되고 설레는 맘으로 그토록 보고 싶은 사람을 마침내 만나게 됩니다. 환하게 웃기도 하고, 눈물을 글썽이기도 하고, 그렇게 보고 싶어 했으면서도 정작 눈앞에 사람이 나타나면 벅찬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서 손으로 입을 가리고 고개를 돌리기도 합니다. 정말 어느 명배우도 흉내 내지 못할 아름다운 표정들 입니다.

<칭찬...>의 주인공의 표정은 또 이와 대조적입니다. 묵묵히 드러내지 않고 선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을 방송국에서는 예고도 없이 찾아가 그들의 얼굴에 카메라를 들이댑니다. 자신을 칭찬하러 오는지도 모르는 그 사람들은 카메라를 바라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습니다. 자신이 칭찬받을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그 표정, 그리고 나중에야 그 이유를 알고 쑥스러운 듯 웃으며 고개를 돌리는 그 모습 또한 정말 아름다운 표정이었습니다.

저는 이 대조되는 두 가지 표정을 보면서 생각 했습니다. <TV는…>에서의 저 주인공처럼 장차 하늘나라를 고대하며 예수님을 만나는 우리의 심령이 바로 저들의 표정 같아야 하지 않을까?  또 이 세상의 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심령은 <칭찬…>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표정 같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장차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의 심령의 표정은 때로 바뀌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많은 문제에 대해서는 너무 긴장하고 기대하며 그것이 손에 쥐어지면 너무 기뻐하고 어쩔 줄 몰라 합니다. 이 세상에서 기대하는 것이 너무 많은 모양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문제나 하늘나라에 대해서는 반대로 덤덤하게 별 관심이 없습니다. 별 기대도 하지 않아 때론 어리둥절하기까지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바울을 보십시오. 바울은 이 세상이 주는 칭찬이나 영광에는 덤덤했습니다. 오히려 자신에게 유익한 세상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로 여기고 배설물과 같이 여긴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믿었습니다(7~8절). 바울은 몸은 이 땅에 살지만 하늘에 소망을 두며 사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의 것에는 덤덤했던 사람이지만 영적인 것에는 잡은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사람이었습니다(13-14절).

우리는 하늘나라의 백성입니다. 우리는 하늘의 사명을 부여받은 하나님의 종입니다. 이 세상의 칭찬과 영광 보다는 장차 받을 하늘의 영광과 하나님의 칭찬을 더욱 기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의 위로를 받는다 했습니다. 힘들더라도 이 땅의 것은 덤덤히, 하늘의 것은 소중히 여기며 주님께서 맡겨주신 이 땅에서의 사명을 잘 감당한다면 <TV는 사랑을 싣고>와 <칭찬 합시다>의 주인공들처럼 장차 기쁨으로 주님을 만나 참 잘했다는 주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