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보험업계의 선구자 임창호 장로 ①
평범한 시골 소년에게 다가온 복음
임창호는 1905년 3월 13일 충북 청원군 부용면 부강리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즈음의 상황은 우리 역사에서 아주 힘든 시기였다.
1894년 동학란(동학농민전쟁)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한반도에 온 일본군은 계속 주둔하면서 조선의 정치를 간섭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오래전부터 조선의 보호국으로 자처한 청국과 서로 반목질시하다가 1897년 청일전쟁이 일으켰고 청국이 패하게 된다.
조선의 고종 임금은 1897년 국가 이름을 ‘대한제국’으로 선포하고 황제로 취임한다. 고종은 일본의 간섭을 피하기 위해 러시아와 외교를 강화하였고 일본은 이에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켜 인천 앞바다에서 러시아함대를 격파하는 등 승리한다. 일본은 이러한 역사적 상황 속에 이완용 등 친일파 대신들을 포섭하여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사늑약)을 체결, 외교권과 경찰권을 장악하여 조선을 지배하기 위한 행보를 구체화 했다.
이러한 정치적 위기 속에서도 한반도에는 한 가닥 소망의 빛이 영적으로 강하게 비치기 시작하고 있었다. 1903년 조선의 선교사들이 원산해변에서 여름수련회를 하다 성령이 임하여 그들은 교만과 나태함을 철저하게 회개했고 이 은혜의 불길이 점점 전국적으로 옮겨 붙어, 1905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은혜의 불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길선주 장로가 인도하는 새벽기도회는 다른 교회 신자들까지 약 5백명이 매일 모여 뜨겁게 기도하며 은혜를 받았다. 이들은 국가의 운명이 하나님의 손에 달렸고 하나님만이 조선의 소망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 은혜의 불이 점점 전국으로 번져가다 마침내 1907년 장대현교회에 전국에서 모인 1천 5백명의 신자들에게 성령이 폭발하여 강한 은혜가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이렇게 국가의 정치적 위기와 은혜의 소망이 교차하는 격동의 시기인 1905년에 이 땅에 태어난 임창호는 가난하지만 순박한 시골농부인 부모의 사랑 속에서 성장했다. 그가 6살이 된 1910년에 한일합방이 되어 5백년을 이어 온 조선이 멸망하여 이 땅은 일본이 지배하는 식민지로 변해버렸다. 그는 세상이 변해버린 것도 모르는 철부지 어린이로 자라 7살에 동네서당에 다니며 한문을 공부하다 10살에 동네 밖에 새로 생긴 소학교에 들어가 공부했다.
서당공부와는 달리 소학교 공부는 여러 가지 것을 배워서 그는 큰 흥미를 느꼈다. 특히 그는 산수라고 하는 셈하는 공부가 가장 재미있었다.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가 신기해서 열심히 공부했다. 이것이 그가 타고난 자질이었다. 장차 보험업을 할 싹이 보인 것이다.
15살에 소학교를 졸업한 그는 상급학교가 있는 줄도 모르고 시골에서 부모를 도와 농사일에 힘쓰는 평범한 소년으로 자랐다. 그는 농사를 짓는 평범한 사람으로 살기 싫다고 생각했고 기회가 있으면 시골을 떠나 넓은 세상으로 나가서 살고 싶었다.
이듬해인 1920년 마을에 처음으로 교회가 시작되었다. 양홍묵 씨의 큰 집에서 서울에서 온 양씨의 부인 여메례 씨가 얼마 전에 서울에서 병으로 죽은 남편의 고향집에 내려와서 동네 여자들을 전도하여 함께 모여 예배를 드렸다. 부강성결교회의 시작이었다.
임창호가 그 집 앞을 지날 때 가끔 여자들이 모여서 부르는 노래 소리를 들었다. 한이 어린 조선의 노래도 아니고, 소학교에서 배운 일본식 어린이 노래도 아니었다. 들을 때마다 어떤 힘이 느껴지는 곡조였다. 그 때 소학교 동창인 친구가 그곳에 가자고 해서 처음으로 어린이가 모이는 주일학교에 갔다. 이것이 그의 일생을 바꿔 놓을 줄 누가 알았으랴.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