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예수님과 만찬
(막 14:12~26)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과 헤어지기에 앞서서 저녁식사를 나누셨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저녁식사를 일컬어 ‘최후의 만찬’이라고 부릅니다. 최후의 만찬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장소는 예수님이 지정하셨고, 식탁의 내용은 떡과 포도주였습니다. 식사자리에서의 대화는 진지했습니다.
유월절이 임박하자 제자들이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으로 잡수시게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라고 묻자 예수님은 제자 중에 두 사람,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시며(눅 22:8) “성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리…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라”(12~15절)고 하셨습니다. 그 집은 사도 베드로가 옥에 갇혔을 때 성도들이 함께 모여 베드로의 석방을 위해 힘써 기도했던 곳이기도 합니다(행 12:5, 12).
그 집은 주님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사용하시도록 내 놓았습니다. 그래서 주님과 제자들의 저녁식사 자리로도, 성도들이 모여 기도하는 장소로도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빌립보성에 살던 자주 장사 루디아도 그의 집을 복음을 위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기쁨으로 제공하였습니다(행 16:15). 그의 집이 선교사 바울의 거처로 쓰여짐으로 빌립보 교회가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내가 가진 소유가 하나님을 위해 쓰여짐을 보람으로 여기는 헌신의 사람을 복음의 전초기지로 사용하십니다. 주님의 일행이 함께 식사할 장소를 제공했던 그 집이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기지가 되게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에 쓴 나물을 먹으며 애굽에서 종노릇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종되었던 험한 곳에서 구원받은 것을 기념하는 것이라면, 예수님과 함께 한 저녁 식사는 죄의 종으로 하나님과 단절되어 살던 인간을 구원하신 은혜를 기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한 저녁식탁에는 떡과 포도주가 준비되었습니다.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이것이 내 몸이니라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니..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22~24절) 예수께서 떼어주신 떡은 인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못박히신 상처를 입고 찢기신 자신의 몸을 상징합니다. 포도주는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 생명을 뜻합니다.(레17:11) 예수님의 피는 살리는 생명이요, 죄사함을 얻게 하시어 우리의 영혼을 기쁘게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양식으로 삼으셨던 예수님처럼 우리도 그의 몸과 그의 정신을 양식으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죄인이 구원 받는 것이 예수님의 최고의 소원이신데 그것을 우리의 양식으로 삼아야 겠습니다.
식탁은 음식만 먹는 자리가 아니라 대화의 마당이기도 합니다. 한 식탁에 둘러앉아 음식을 나누며 대화를 나누면서 한 마음 한 가족이 됩니다. 식탁이 풍성하지 못할지라도 대화가 있고 화목과 화평 그리고 평안이 있는 가정은 아름답고 행복합니다.
예수님과의 대화는 우리의 인생을 달라지게 합니다. 예수님의 높은 감성과 충고와 생각을 받아들여서 나의 인생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의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는 진지한 대화가 있습니다. 그리고 충격적인 말씀이 나왔습니다. “너희 중에 한 사람,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도대체 그가 누구일까? 제자들은 각자 자신의 마음을 살피며 근심하며 하나씩 돌아가며 말합니다. 주여 내니이까? 유다도 그 자리에 앉아 그 말을 듣고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한 저녁 식사는 찬미로 끝납니다. “이에 저희가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가니라”(26절) 예수님의 충격스러운 한마디의 말씀이 식사의 분위기가 어두워지고 우울해졌으며 불길함을 예측하기 충분한 얼굴표정들이였지만 그 같은 불안한 자리에서도 찬미의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자들의 특별함이 여기에 있습니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