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탁구를 알면 목회가 보인다
“목사님! 뭐해요?” “음, 탁구!” “아니, 목회가 뭐냐니깐, 무슨 놈의 탁구야!”
버럭 지르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넓지 않은 공간에서 이십여 명이 떠드는 소음으로 청각이 전같지 않은 내 귀가 ‘목회가 뭐예요’를 ‘목사님 뭐해요’로 잘못 들었다.
다른 교단에서 목회하는 K목사의 친구가 ‘목회가 뭐냐’고 묻더란다. 갑자기 질문을 받으면 잘 아는 것도 개념정리가 안되어 얼른 대답하기가 어려울 수 있다. K목사도 그랬던 모양이었다. 질문을 받곤 내 생각이 떠올라 급히 전화를 하면서 안부도 묻지 않은 채 다짜고짜로 본론을 말했던 것 같다. 목회가 뭐냐는 질문에 탁구라고 대답한 내 꼴이 너무나도 황당했다.
그 후론 탁구를 칠 때마다 그 생각이 떠오르면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나는 허약체질을 극복하려고 젊어서부터 탁구라켓을 잡았다. 구력으로만 따지면 탁구실력이 상당한 수준이여야 하는데도 영 신통치 않다. 잘못된 습관만 고치면 될 텐데 그게 쉽지 않아 스트레스가 쌓인다. 내 문제점은 손에 쥔 라켓이 흔들리는 것, 공을 정확히 보지 않는 것, 온 몸에 힘이 들어가는 것 등이다.
요즘 교회성장이 어려워 목회자들의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닌 것 같다. 누구는 교인 수가 줄어 압박을 받다가 조기은퇴를 했다는 둥, 누구는 짐을 싸기 일보직전이라는 둥, 뒤숭숭한 소문에 목회자들 입술이 바싹 바싹 마르는 눈치다.
생산 목표를 채우지 못한다고 업주에게 시달림 받는 고용인처럼 주인 행세하는 신자들 등살에 고민하는 목사들이 꽤나 있는 것 같다. 이런 괴이한 일들은 은혜와 진리보다 물량만을 고집하는 세속화의 현상 때문이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이 심상치 않은 바람몰이가 언제 내 목회현장으로 밀려올지 몰라 안절부절 못하는 목회자들이 측은해 보인다.
탁구 실력이 늘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는 늙은이가 신도 숫자가 늘지 않아 고민하는 후배들을 보며 동병상련을 느낀다. 그리고 목회와 탁구는 공통점이 없을까 생각해 본다.
이질적인 것에서 동질성을 발견하고 전혀 다른 것에서 유사점을 발견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생각해 보면 탁구와 목회도 서로 닮은 점들이 있다.
탁구 라켓이 흔들리지 않게 꼭 잡는 건 쉬운 것 같으나 어려워 고민하는 나처럼 십자가를 흔들리지 않도록 꼭 잡고 있는지 목회자들이 고민했으면 좋겠다. 가치의 혼돈으로 교회마저 방향감각을 잃고 표류하는 지금, 잡고 있는 십자가마저 이리저리 흔들리면 목회는 심각한 위기를 맞을 수 있다. 십자가는 목회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탁구만큼 섬세함을 필요로 하는 구기종목이 없다. 지름이 고작 40mm의 작은 공, 무게라곤 겨우 2.7g의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졌지만 거기서 나오는 다양한 회전은 가공할 지경이다. 함부로 라켓을 휘둘렀다가는 공이 어디로 튈지 모른다. 신도들이 꼭 탁구공을 닮았다.
탁구공의 구질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선 낮은 자세여야 한다. 신도를 대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들과 무시로 눈 맞춤을 하며 품고 있는 각양각색의 생각을 헤아려 소통하기 위해서는 가장 낮은 자세와 섬세함이 필요하다.
내 탁구에 또 하나 고질적인 문제는 힘을 빼지 못하는 데 있다. 약한 바람에도 날아가는 탁구공인데, 어깨와 허리에 힘이 잔뜩 들어가서 게임을 망치다니, 내가 나를 이해 못하겠다.
이참에 목회자들이 십자가는 꼭 잡고 자세는 낮추고 목과 어깨 힘은 빼면 어떨까 싶다.
목회가 뭐냐는 질문에 탁구라고 응답한 건 말실수만은 아닐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