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3.1운동 100주년과 우리의 정신
대한민국 국민이 3.1운동을 모른다고 하면 국민으로서 수치스러운 일이다. 기미년 3.1운동은 1904년에 일본이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고 조선에게는 1910년에 을사늑약을 강요하고 1915년에 결국 우리민족의 말살 정책으로 우리나라는 일본의 속국이 되어 국권을 상실하였다. 이후 1919년 3월 1일에 기미년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운동은 우리 민족 자존의 자의적 정신으로 당초에는 종교인 33명(천도교 15명, 기독교 16명, 불교 등 2명)이 중심이 되어 전개됐다.
그 계획과 준비된 것을 보면 첫째, 구성은 종교단체가 중심이 되었다. 둘째, 독립선언문 작성은 민족자존의 정신과 인류평화의 대의를 천명한 본문은 최남선이 작성하였고 광명정대의 행동강령인 공약 3장은 하용문이 작성했다. 셋째, 3.1운동의 특색은 무저항주의였다. 이는 천도교의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화의 3대 원칙으로 비협조의 비폭력적인 무저항주의를 채택했던 것이 특색이다.
또한 독립운동의 전개사항을 보면 이도 역시 3단계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1단계, 애국 계몽운동의 지도층으로 민족대표 33인이 종로 태화관에서 독립선언문을 발표하였다. 2단계, 학생들이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과 노동자 농민, 상인, 시민 등이 시위대로 발전하여 전국중요도시 서울, 평양 등 대도시로 확산하였다. 3단계, 지방의 주요도시에서 농촌으로 확산 218개군 중 211개군이 시위에 가담하여 농민들의 운동이 주가 되었고 대중화 되어 갔다. 이 운동은 또한 해외로 파급되어 만주, 연해주 등 해외의 조선인이 모두 가담했었던 것이다.
이렇게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은 결국 일본의 탄압으로 지하로 스며들었다. 그 원인을 3가지로 보면 조직력부족으로 민중의 힘을 결집하지 못했고 연속화하지 못했다. 둘째는 무저항주의로 비폭력 시위에 대해 일제의 무력으로 야만적 탄압을 당해 희생자만 발생했다. 셋째는 일본의 전승으로 조선독립문제가 국제적 여론화되지 못했다. 그래서 일본 제국주의에 무도한 탄압으로 3.1독립운동은 피 흘림으로 막을 내렸다.
우리나라가 다시 소생케 됨은 1945년 8월 15일, 세계 2차 대전에서 미국이 일본에게 원폭을 투하하자 일본이 손을 들게 되어 해방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해방도 잠시,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아침 북에서는 남침을 감행하여 폐허의 상태로 돌입했다. 수많은 역경 속에서 UN군의 가담으로 전쟁은 휴전상태에 이르렀고 어느덧 2019년이 됐다.
오늘의 현실은 참으로 그 어느 때 보다 중요한 시기다. 온 국민이 연합하여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새롭게 세워나가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정신과 자세를 함께 생각할 일이다.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은 3.1운동이 기미년에서 기해년으로 꼭 100주년이 되었으니 기미년에 부르짖었던 3.1 독립운동을 회상하면서 또한 분단의 아픔이 74년이나 되는 2019년을 맞이하여 우리는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통일을 염원해야한다. 또한 복음 안에서 기도운동과 사랑의 실천운동이 절실히 요구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