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구약단상> 이해되지 않는 마라의 사건①
200만 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헤메이다가 정말 큰 일을 당했습니다. 광야 한 가운데서 모든 백성이 갈증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광야에서 물이 없다는 것은 정말 그들을 당황시키기에 충분한 사건이었습니다. 광야 한 가운데서 물이 없어 큰 위기를 경험했던 저에게는 그들이 얼마나 당황하고 무서워했을지 어느 정도 상상이 가는 대목입니다.
더욱이 ‘홍해’에서부터 ‘마라’(히.마라)라고 일컬어지는 곳까지는 약 53km정도의 거리입니다. 그런데 이 거리를 3일 동안 걸었다고 한 것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어느정도 짐작이 갑니다. 노인과 여자와 어린이들을 포함하여 약 200만 명이나 되는 무리의 수가 수많은 가축들을 거느리고 식량과 가재도구를 가지고 거칠고 험한 광야를 여행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겁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디어 물을 발견했는데 그 물은 도저히 써서 먹지 못하는 물이었습니다. 비록 성경에서 ‘쓰다’라고 표현 했습니다만, 그 물은 분명 마라 근처에 있던 홍해바다의 영향 때문이었습니다. 홍해로부터 짠물이 땅에 스며들이 물 웅덩이를 이루어서 매우 짰을 것이고 목이 말라 갈증을 느꼈던 그들에게 그 물은 쓴 맛을 느끼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하셔서 근처의 한 나무를 물에 던지게 하셨고, 그러자 그 물이 먹을 수 있는 단 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는 쓴물을 단물로 바꾸신 하나님은 자신을 일컬어 “나는 치료하는 여호와”라고 계시합니다. 이 부분이 무척 궁금했던 대목입니다.
목말라 하는 백성을 위해 쓴물을 단물로 바꾸는 기적을 행하시면서 하나님은 자신을 일컬어 “나는 치료하는 여호와”(히.아니 아도나이 로페에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건에서 하나님은 “나는 치료하는 여호와”라기 보다 “나는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이다”라고 말씀을 하시는 편이 더 낫지 않았을까요?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실 때마다 대부분은 일어난 사건과 연관을 시키셨습니다. 이를테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이 준비한 제물 이삭 대신 한 마리 양을 준비하시면서 하나님인 자신을 가리켜 ‘여호와 이레’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그 상황에 매우 적절한 하나님에 대한 계시였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이레’란 “여호와께서 준비하실 것입니다”라는 의미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쓴물을 단물로 바꾸시고 나서 다른 표현도 많이 있었을 텐데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하나님”(히.아니 아도나이 로페에하) 이라고 하셨다는 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치료’(히.로페)라고 하는 말은 아픈 사람에게나 해당이 되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마라의 쓴물 사건은 치료의 사건이라기 보다 마실 수 없는 물을 마실 수 있는 단물로 바꾸어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신 사건으로 비춰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뜬금없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일컬어 ‘치료의 하나님’ (히.아도나이 로페하)이라고 계시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