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리모델링> 생각을 자극하는 설교!

2009-03-14     정인교 교수(서울신대)

설교는 일종의 대화의 연속이다. 영적으로 설교자와 하나님간의 대화이고, 설교준비의 측면에서는 설교자와 성경본문사이의 대화이다. 또 설교실행이라는 차원에서는 설교자와 회중 사이의 대화이다. 

흔히 우리는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이야기하고 그래서 ‘선포’라는 대용어를 사용한다. 핵심원리로부터 특수한 사례로 나아가는 연역적 설교방식은 이런 설교의 신학적 특색을 드러내는데 분명한 장점이 있다. 그러나 이런 구도는 대화라는 설교의 또 다른 측면을 놓치기 마련이다.

지당한 해답을 제공받았으니 아무 생각도 없이 그냥 듣고 있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준비가 안 된 다수에게는 들리지 않는 설교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특히 개인의 주체성이 강화되고 절대적 가치에 질문을 던지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회중들을 상대하려면 ‘대화’로서의 설교를 회복해야 한다.

대화의 가장 기본적인 성격은 쌍방성이다. 이 말은 설교가 더 이상 설교자 홀로 북치고 장구치는 모놀로그(Monologue)가 될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대화로서의 설교를 실현한다는 것은 회중들을 설교에 들어오게 하는 것을 말한다. 즉 만들어놓은 일방적 해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해답을 같이 만들어 가는 것, 그리고 회중으로 생각하도록 만들어가는 것이다. ‘생각하게 한다’는 것은 곧 문제라고 느낄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지극히 당위적이라 느끼는 것에는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가령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는 문장은 아무 문제의식이 들지 않는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어떤 생각도 유발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 특히 당신에 대해 어떤 관심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라는 문장은 당사자에게 심각한 문제의식을 갖게 하는 것으로 깊은 생각을 유발한다. 생각한다는 것은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수동적으로 듣는 것과는 다르다. 생각함이라는 주제에 관심의 발을 들여 놓는 것이며 설교 속에 동참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최근 설교학의 흐름에 주인공처럼 회자되는 귀납적 설교와 스토리텔링은 모두 문제의 제기와 문제의 해결이라는 공통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설교의 절반 정도가 회중에게 문제를 제기하고 문제를 공유하도록 하는 데로 모아지고 있다. 조급하게 해답을 제시하기 보다는 충분한 공감과 생각이라는 과정을 회중들이 거치도록 함으로 설교를 일방적 수동적 경청이 아닌 적극적 능동적 참여로 이끌고자 하는 것이다.

설교는 설교자를 위해서가 아닌 회중이라는 대화 파트너를 상대하는 ‘하나님의 서비스’이다. 설교대상의 커뮤니케이션 통로가 바뀌었다면 거기에 적응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