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용서하는 마음
대통령이 거듭 사죄를 했지만 그 어디에도 용서하자는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고 “하야하라” “퇴진하라” 는 목소리만 점점 거세게 몰아치고 있는 모습이다. 모두가 심판자로 나서서 심판하자라는 목소리만 크게 들린다.
지금 대세로는 대통령이 다시 사과를 한다 해도 대통령을 용서하자는 구호는 보이지 않을 태세다. 부족과 허물이 있었지만 그래도 나라의 대통령이고 나라를 위해서 세계를 다니면서 열심히 일한 모습도 있었다고 본다. 그런 대통령을 심판하자고만 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를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오늘의 우리 사회는 무엇보다 용서가 모자라는 것 같다. 부부가 서로 용서가 부족해 깨어지는 가정이 많고, 부모 자식 간에도 용서가 부족해 행복한 가정이 되지 못하고, 형제 간에도 용서가 부족해 왕래가 드물고, 직장에서 역시 용서가 부족해 이직을 생각하면서 직장 생활하는 이가 얼마나 많은가. 용서가 없는 가정 사회 국가는 결국 불행으로 가는 지름길이 아닌가 싶다.
성경에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를 빌면 용서해 주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마 18:22) 뉴스에 침통해 보이는 대통령의 얼굴을 걸어놓고 대통령을 정죄하는 목소리를 계속 내보내고 있는 것을 보노라면 마음이 아파서 채널을 스포츠로 돌리곤 한다. 오늘 새벽에는 자다가 깨어 끊임없이 고문당하는 대통령으로 인하여 가슴에 약간의 통증을 느끼면서 어두운 마음으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우리 사회가 언제부터인지 용서의 미덕을 잃어버린 것 같다. 그 때문에 모두가 불행해진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다.
나는 어렸을 때 왜 사는가에 대해 고민한 적이 있다. 그 당시 나는 시골에서 중학교를 다니던 중 큰 꿈을 가지고 서울로 올라왔지만 그 꿈은 다 깨어지고 중학교마저 다닐 수 없는 형편이 되고 말았다. 그 때문인지 머리가 아파서 잠을 자지 못하여 파리해져 갔고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런 나를 주변 사람들은 모자라는 사람으로 취급하는 모습을 느끼면서 삶의 모든 희망을 잃고 나의 유일한 길은 이제 죽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때 나는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삶의 이유를 따지게 되었다.
이렇게 힘들고, 아프고, 외롭고, 괴롭고, 사랑과 위로가 없는 세상에 내가 살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죽음을 택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어떻게 죽을까를 생각하던 중 나는 내가 죽지 않고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게 되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39~43)는 말씀이 내가 살아야 할 이유로 다가왔다.
그렇다. 내가 먹기 위해 마시기 위해 입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지만 오른뺨을 치면 왼뺨을 돌려대고 속옷을 가지고자 하면 겉옷까지 주고 오 리를 동행하고자 하는 자에게 십 리를 동행하고 원수를 사랑하면서 사는 것이야 말로 가치 있고 멋있는 삶처럼 느껴졌다.
그 이후 다시 용기를 내어 모든 고난을 이기고 어렵게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닐 수 있었다. 내가 지금 꼭 그렇게 살지는 못할 지라도 좋은 목표를 삼는 것은 행복한 삶의 지름길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용서가 없는 마음에는 행복은 점점 멀어져 갈 것이고 그러나 용서하는 마음에는 행복이 찾아와 꽃피고 열매 맺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