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신(春信)

2015-03-04     위영 사모(서울서지방∙행신중앙)

위영 사모(서울서지방∙행신중앙)
속칭 땅콩 회항 사건을 일으킨 조현아에 대한 실형이 선고 됐다. 항로변경 죄가 크다고 했지만 사람을 생각하는 판관의 시선이 암향(暗香)처럼 느껍게 다가왔다.

조현아는 자신의 어린 아이들에게 돌아가게 해달라고 여섯 번이나 반성문을 썼다고 한다. 땅콩을 접시가 아닌 봉지 채 주었다는 이유만으로 야수(?)가 되었던 분방한 사람이 두루마리 화장지와 수저만으로 시간을 보내고 나눠주는 샴푸에 배려를 생각했다니 40여 년 살아온 세상에서보다 감옥에서의 며칠이 더 많은 공부가 되었을 것이다.

비록 눈길 한번 안 주었다지만 딸을 위한 마음으로 대기업 오너가 법정에 서서 증언까지 해서 문외한의 눈으로도 설마 실형까지야 가겠는가 했는데…. 선고는 의외였다.

돈이 만능을 넘어 경배의 위치에까지 다다른 이 맘몬이즘 시대에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와 배려심이 있었다면, 승객을 비롯한 타인에 대한 공공의식이 있었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사건”  “인간의 존엄과 가치, 자존감을 무너뜨린 사건”이라는 선고의 변이 참으로 신선하다. 지루한 겨울을 마감하는 신선한 춘신(春信)아닌가.

사실 인간에 대해 가장 먼저 가장 아름다운 춘신을 보내오신 분은 예수님이시다. 한사람의 영혼이 천하보다 더 귀하다는 말씀은 사람에 대한 서언이자 결론이며 역사이다.

이 아름다운 말씀은 구원의 근간을 이루어감과 동시에 현세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환경과 처지를 떠날 수 있는 강력한 자존감을 주었다.

더불어 타인에 대한 시선을 부드럽게 하는데 즉효약이었다. 사람은 동물이지만 동물이 아니다. 동물과는 전혀 다른 영혼이 있고 격이 있기 때문이다. 이 격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해주신 격이기도 하지만 우리 안에서도 서로 인정하고 높여줘야만 하는 격이다.

그런데 작금의 교회는 어떤가, 예수님의 몸, 성전이며 또한 성전의 지체이기도 한 크리스천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에 과연 사람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예수님의 정신이 있는가.

분에 넘치는 성전을 지어놓고 빚에 허덕이며 교인들 머리수가 돈으로 환산이 되더라는 고백이야 하도 어려우니 하는 푸념이겠지 넘기더라도 정말 가난한 이와 힘없는 이들이 교회 안에서 사랑받으며 세상을 견디어낼 힘을 얻는가.

궁전인지 성전인지 알 수 없는 거대한 예배당 안에 들어서면 내 작은교회에만 익숙해선지 도무지 예배당 같지가 않아서 손을 모으기 보다는 먼저 두리번거리게 된다.

어쩐지 그런 거대한 예배당에서는 ‘섬김’보다는 ‘누림’이 ‘겸손’보다는 ‘교만’이 ‘예수님’보다는 ‘내’가 더 주인처럼 행세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은 틀림없이 나만의 기우일 것이다.

며칠 전 숲길을 걸을 때 생강나무 봉오리가 가득 부풀어 오른 것을 보았다. 금방이라도 꽃순을 세상으로 내보낼 기세이다.

무슨 힘이 있어 저렇게  단단한 나무를 뚫고 연약한 꽃잎은 솟아날 수 있는 것일까, 죽은듯한 나무 어디에 노오란 색은 숨어있는 것일까?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러나 금방 피어날 생강나무 봉오리를 보며 나의 ‘부활’을 선명하게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