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신약단상 ⑥> “새해를 맞아,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네오스’와 ‘카이노스’-
예수께서는 생각과 삶의 모습에 있어서 굳을 대로 굳어져서 당신의 혁신적인 삶의 모습을 이해하지 못하며 혼란스러워하는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 본문의 말씀을 던지신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새로운 것들이 쏟아져 들어오는데, 그것을 용납할 그릇이 준비되어 있지 못하면 시험만 될 뿐이다. 터지고, 깨어질 뿐이다(cf. 마 21:44).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오직 마음과 생각을 새롭게 할 때에만이 그것들을 수용하고 누릴 수 있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이 가르침에서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라는 말씀에서, 첫 번째 “새”는 ‘네오스’(νέος)이고 두 번째 “새”는 ‘카이노스’(καινός)로서, 번역 상에는 같지만 원어 상으로는 다르다. 이 의미의 차이는 좀 더 깊이 들여다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네오스’와 ‘카이노스’는 유사한 뜻을 가지고 있고, 그 실제 사용에 있어서 그 차이는 미묘하다. 그러나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는 차이가 있다.
지면의 제한성을 고려하여 그 차이를 필요한 만큼만 최소화하여 설명하면, ‘네오스’는 새롭게 생기거나 주어진 일반적인 새로운 상태를 의미하는 반면에, ‘카이노스’는 질적인 변화를 통한 새로운 상태, 또는 특정한 과거의 것과 대비하는 개념으로서의 새로움을 의미한다.
다시 풀면, 수동적이고 자연적으로, 그리고 시간적으로 발생하는 새로운 것을 ‘네오스’적이라고 한다면, 특별하고 의도적이며 능동적인, 그리고 질적 변화와 함께 형성되고 또는 제시되어지는 것을 ‘카이노스’적이라 한다.
본문에서도 “낡은 가죽부대”와 뚜렷이 대비된 존재를 나타내기 위해 ‘카이노스’를 사용하여 “새(‘카이노스’) 가죽부대”라고 한 것이다.
‘네오스’적인 새것들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우리 주위에 늘 존재하고 발생한다. 그러나 “카이노스”적인 새것들은 그냥 발생되거나 부여되는 것이 아니다.
자기존재에 대한 고민과 몸부림, 그리고 더 본질적으로는 성령의 변화의 능력으로만 ‘카이노스’의 새로워짐이 가능하다. 그렇게 ‘카이노스’의 새로움을 통해 ‘새 부대’로 준비된 존재에게만이 진정한 ‘새것들’이 충만하게 채워질 수 있다.
새해를 맞았다. ‘네오스’적인 새해는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다. 그리고 그 안에는 놀라운 새로운(‘네오스’) 것들이 본질적으로 가득하다.
특별히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백성들에게는 더욱 풍성한 새로운 것들이 준비되어 있고 베풀어질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 새로운(‘네오스’) 것들의 진정한 수혜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나의 새로워짐(‘카이노스’)이 선행되어야 한다.
자신 안에 ‘카이노스’적인 새로워짐, 즉 가치관과 품성의 본질적인 변화를 구하고 과거와 구별되는 나로 새롭게 변화됨을 체험하는 사람에게만 진정한 새해가 열리고 하나님이 베푸시는 새로운 좋은 것들로 채워짐을 받을 수 있다.
새 부대에 채워지는 새 포도주의 충만함이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바울 사도는 이러한 경험으로 그리스도인의 카이노스적인 새로워짐에 대해 선포하고 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있으면 새로운(‘카이노스’)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카이노스’) 것이 되었도다!” 이 선포가 새해를 시작하는 우리의 고백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