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 칼럼> 종교 개혁인가 기독교 개혁인가?
중국 남북조 시대에 제나라와 양나라 사이에서 활동한 유물주의 철학자이자 무신론자인 범진(450~510년)이 있었다. 그는 어려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집안이 가난했으나 뼈를 깎는 고통을 참아가며 공부하여 경전과 학술에 능통하였으며, 성품이 곧고 소박해 권문세족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불교를 비판하고 무신론 사상을 널리 퍼뜨리며 사회개혁의 수단으로 ‘한 사회의 갈 길을 정하는 극히 현실적이고 중대한 문제라’고 ‘신을 죽인다’는 신멸론(神滅論)을 주창하였다.
6세기경은 불교 신앙이 한창 왕성하던 시기였다. 봉건 통치자들은 백성들을 정신적으로 옭아매 생산 활동에 부려먹고 자신들의 통치를 견고하게 다지기 위해 불교를 크게 일으켰다. 불사와 승려 무리들이 크게 증가하며, 사회의 재부와 토지가 대부분 불교를 위해 쓰여 생산 활동이 위축되고 백성들에게 가혹한 부담이 가중되면서 심각한 경제 위기가 조성되었다. 그때에 범진은 왜 불교가 교세는 확장하면서 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뜻은 얕은가? 왜 자신의 복은 깊이 구하면서 남을 구하고자 하는 뜻은 얕은가? 라는 질문을 하며 “불교가 정치에 해를 끼치고, 사문들이 풍속을 좀먹는 일이 마치 미친 바람이나 짙은 안개처럼 무성하게 일어나 그칠 줄을 모릅니다. 나는 그 폐단을 슬퍼하여 부처에게 미혹된 사람들을 구해내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위한 복을 누릴 생각이 깊으면서도 세상 사람들을 구하고자 하는 뜻은 얕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친구에게 쌀 한 톨을 보낼 때는 인색한 기운이 얼굴에 가득 흐르고, 부유한 승려에게는 천 섬의 쌀을 공양하면서 도리어 속마음에서부터 솜털까지 온몸으로 후련해합니다. 가난한 친구는 쌀 한 되만큼의 보답도 못하나, 중은 곧바로 극락으로 보내 주겠다는 약속을 하기 때문입니다. 승려들은 밑도 끝도 없이 까마득한 거짓말로 사람들을 현혹하고, 지옥의 고통으로 겁박하고 허황된 말로 유혹하고 도솔천의 즐거움으로 들뜨게 하니, 사람들이 선비의 옷을 벗고 승려의 가사(袈裟, 옷)를 입으며 정통의 예기(禮器)를 버리고 불교의 바리때를 받고 있습니다. 아래에서 남는 재물로 위를 봉양하고 높은 벼슬아치들은 청정무위하게 백성들을 대해야 합니다. 그래야 생명을 온전히 보존할 수 있고, 부모를 모실 수 있으며, 자기를 위할 수도 있고 남을 위할 수도 있고 또한 나라를 지킬 수도 있으니, 군주는 이러한 방법을 써야 하는 게 도리입니다”라고 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인과응보를 믿었기에 죽은 뒤인 내세의 행복을 추구했으며, 날이 갈수록 개인적인 이기와 기복만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바뀌어 갔다. 많은 재산을 사원에 기꺼이 헌납하면서도 가난한 친척과 친구에게는 인색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범진은 모든 사람들이 삶과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내세가 없다는 것을 안다면 각자 그 본성에 맞추어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불교를 버리고 사람들이 서로를 도우면 각자가 풍족하고 편안한 삶을 살 수가 있고, 부모를 공양하고 남을 도울 수도 있으며 나라의 안위를 지킬 수도 있다는 논리를 폈다.
위의 글은 동양의 고전인 쟁경(爭經)에서 인용한 글이다.
종교는 사람들의 마음에 평안과 소망을 주어야 한다. 종교는 세상에 평화와 사랑을 주어야 한다. 종교는 민족에게 희망을 주며 사회에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 종교는 영혼의 깊은 곳에 평화와 안식과 참 소망을 주어야 한다. 그러나 ‘평화의 두 얼굴’의 저자 박충구는 ‘나쁜 종교는 평화를 가장한 탐욕을 가르친다’라고 하였다.
박충구는 ‘좋은 종교와 나쁜 종교는 본질적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고, 한자가 의미하는 대로 종교(宗敎) 자체는 높은 가르침을 지향한다. 그러나 그 가르침을 해석하는 사람들이 다르게 해석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오늘의 종교는 종교의 가르침을 품은 성직자나 종교지도자의 산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종교마다 시원적(始原的)인 가르침에는 높은 뜻이 담겨 있지만 안타깝게도 일평생 신앙의 길을 걸었다고 자부하는 이조차 본래의 가르침을 배반하는 경우를 적지 않게 본다’고 하였다.
필자는 일부 기독교의 지도자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일탈하여 신앙을 상품화하려는 데 우려를 표명한다. 가난과 고난의 자리에서 신앙으로 벗어나기를 소망하며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이들에게 그리스도를 상품화하여 교회의 비대화를 꿈꾸는 매머니즘 추종자들이 없기를 희망한다. 구원과 축복으로 위장된 탐욕이 기독교에서 사라지기를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