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위기(危機) : 위험(危險)인가, 기회(機會)인가?
한국교회를 진단하면서 흔히 교회성장의 정체나 신자 수의 감소를 ‘위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위기는 눈에 보이는 형체나 사람이 헤아리는 산술에 있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음을 파악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많은 사람 가운데 나그네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대 제국의 노예였던 히브리민족을 선택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유대 땅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 오셨고 갈릴리 어부를 비롯한 보잘 것 없는 작은 무리를 제자로 부르시고 그들을 교회의 기초로 삼으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크기나 숫자가 아니라 부르신 이의 뜻에 합당한 자세로 좋은 관계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의 위기 진단은 사회학적인 분석이 아니라 신학적이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베푸신 비유 가운데 어떤 청지기의 이야기가 있습니다(눅 16:1~13). 주인에게 해고 통보를 받은 청지기가 재빨리 채무자들을 불러 계약내용을 임의로 수정하여 인심을 얻음으로써 자신의 일자리를 잃은 뒤에도 생존을 보장받았다는, 좀 교활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청지기가 주인의 편에 서있을 때에는 무리하게 많은 임대료를 받으려고 소작인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계약을 할 수 있습니다. 빚을 독촉하고 의무금을 거두어들일 때 혹독하고 인색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성실하고 합당한 근거로 요구해도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거나 인기가 좋았을 리 없습니다. 그러나 소작인의 편에 서서 의무금의 액수를 줄여주는 그를 이제는 모두 다 좋아하고 환영하였을 것입니다. 결국 청지기에게 닥친 위기는 그로 하여금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불의한 재물을 모으는 일에 쓰임 받던 그가 억눌린 사람을 자유케 하고 기쁨을 줌으로써 재물보다 더 귀한 친구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 비유의 목적과 결론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라는 말씀에 있습니다. 교회는 언제나 “하나님인가 재물인가?” 선택하고 결단하는 문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더 많은 수입과 더 편한 생활을 위해 탐욕스럽게 이익만을 추구하는 부자와 그에 속한 청지기는 결국 재물(Mammon)을 섬기는 것입니다. 욕심 때문에 눈이 어두워지고 마음을 빼앗기면 재물이 곧 신(神)이 됩니다.
바울 사도는 “순진한 자들을 유혹하여 그리스도를 섬기지 않고 자기 배만 섬기는 자들의 미혹”을 경계하였고(롬 16:19), “탐심은 우상숭배”라 하였습니다(골 3:5). 물질은 단순히 소유나 재산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등한 대상으로 인간 위에 군림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카네기는 “인생의 반은 부를 축적하는데, 나머지 반은 이를 보람 있게 사용하는데 전력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면서 “돈을 잔뜩 짊어진 채 죽는 것은 미련한 짓”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술가처럼 벌어 천사처럼 써라”라는 말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돈을 버는 태도에 따라 천박한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예술가가 될 수도 있습니다. 돈을 쓰는 모습에 따라 악마가 될 수도 있고 천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작은 위기는 요즘 생활에서 작게 변화되어야 할 것을 요청하는 신호입니다. 큰 위기와 실패는 인생의 본질을 깊이 들여다보고 자신의 삶 전체를 돌아보면서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신호입니다. 해고통보를 받은 청지기처럼, 한국교회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그 순수성과 성실성을 의심받고 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관리하고 거두어들이는 일보다 나눔으로 기쁨을 주는 복음전도자로서의 본질적 직능을 회복해야 합니다.
교회는 불의한 재물을 쌓는 일보다 그것을 바르게 사용하여 영원한 친구를 얻어 교회 밖의 사람들이 좋아하고 신뢰하는 공동체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한국교회의 위기(危機)는 위험(危險)한 때일 수 있지만 원래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는 좋은 기회(機會)일 수도 있습니다(危機=危險+機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