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담임목사님을 찾습니다
본의 아니게 정말로 자신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지방회 모(某) 교회의 치리목사가 되었습니다. 헌법에 의하면 치리목사는 한시적인 당회장이고 저의 임무는 헌법 절차를 따라 후임 목사님을 청빙(請聘)하는 것입니다.
첫 정기 당회에서 본인은 인사와 관련한 회무 외에는 관여하지 않는 것으로 입장을 정리했습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소집된 임시당회에서 청빙공고와 관련한 문건이 제시되었습니다. 당회원 기도회에서 합의된 것이라고 합니다.
문건에는 제가 동의하기 어려운 조항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의견을 존중해 주었습니다. 다만 두 가지 제 생각을 밝혔습니다. 후일의 역사를 위한 것입니다.
첫째, 후임목사 청빙 공고를 낼 때 연령과 학력은 제한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해당 지교회가 자신들의 기준으로 선택할 텐데 굳이 이러한 조항으로 미리 지원자를 제한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형태의 제한규정은 자칫 대한민국 헌법이 보장한 차별금지원리에 위배될 수 있습니다.
둘째, 청빙제에 담긴 삼고초려(三顧草廬) 정신의 회복입니다. 청빙은 말 그대로 ‘예(禮)를 갖춰 모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형식적인 예가 아니라 예의 진정성입니다. 예의 뿌리는 성(誠)입니다.
작금의 담임목사 청빙제는 외견상 공모제가 대세인 것 같습니다. 추천제를 병행하는 교회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과문해서인지 몰라도 어느 교회가 자기 교회 교세에 비해 규모가 큰 교회 담임목사님을 삼고초려하여 모셨다는 기사를 읽어 본 적이 없습니다. 역으로 교단의 중심교회에서 소위 잘나가는 어떤 목사님이 삼고초려에 의해 교세가 훨씬 약한 교회로 청빙되어 갔다는 기사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언젠가부터 한국 교회의 청빙제는 교세가 작은 교회에서 조금 더 큰 교회로 아니면 현재 문제가 있는 교회들이 교세에 맞춰 목회리더십을 교체하는 방식으로 고착화되고 있습니다. 큰 교회에서 부목사로 섬기던 분들을 내보내는 출구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일부 목회자들 사이에는 청빙과 관련해 “개교회 당회원들은 오너(owner)들이고 담임목사는 얼굴마담”이라는 자조적 억측이 진실인양 유통되기도 합니다. 담임목사 청빙 과정에 이미 시장원리가 작동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청빙의 ‘예’가 이미 성(誠)의 뿌리를 떠나 시장원리의 터 위에 작동되고 있다는 현실은 엄중히 반성되어야 합니다. 아니 이런 현실이 고착화되는 현상(status in quo)에 교회는 저항해야 합니다.
저는 두 번째 정기 당회를 주재하면서 우리 교단에서 작금 상징적인 아이콘으로 활동하고 있는 두 분 목사님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거명했습니다. 청빙공고 전에 당회원들이 혹시 이러한 분들을 삼고초려하여 모셔올 생각을 해 보신 적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모두 상상 외의 질문으로 여겼습니다. 저는 삼고초려는 청빙제의 본질이고 현실에 대한 역발상이라고 말했습니다. 하긴 제가 거명한 목사님들이 삼고초려의 청빙일지라도 청빙에 응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최근 교단 내 교회개혁과 목회갱신을 주도하는 목사님들에게 그들의 진정성은 오직 ‘대의와 명분을 따라’ 그들이 스스로 더 낮은 사역지로 내려 갈 수 있을 때 비로소 증명될 수 있다고 충언한 바 있습니다.
그건 그렇고 제가 지금 치리하고 있는 교회는 대구 성결교회의 모체이자 상징입니다. 대구지방회 구성원들은 심지어 이 교회가 대구 기독교의 아이콘으로 세워지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개교회주의를 넘어 대구 시민을 대상으로 기독교적 가치와 본질을 견고히 보존하고 확장시킬 수 있는 큰 목회리더십을 가진 목회자 어디 없습니까? 당회원들은 삼고초려가 아니라 칠고초려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