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산책 <19>
“그가 앉아 계신 것만으로도”
조만식(1883~1950) 선생하면 사람들은 흔히 물산장려운동을 떠올린다. 물산장려운동은 1922년 2월부터 1937년 4월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될 때까지 15년 동안 “내 살림은 내 것으로"라는 구호 아래 전개된 범민족적인 애국운동이자 민족각성운동이었다. 물론 이 운동의 정신적 토대는 기독교였다.
조만식 선생은 1904년 친구 한정교의 권유로 기독교에 입교했다. 22세 때의 일이다. 당시 그는 평양의 잘 나가는 사업가이자, 특히 놀기를 좋아하는 대주가(大酒家)로 소문 나 있었다. 그런 그가 신앙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옛 술친구들과의 결별을 선언했다. “자네들은 모두 나에게 좋은 친구들이었어. 그러나 그런 우정도 오늘이 마지막일세. 난 예수 믿는 사람이네… 앞으로는 술을 마시려고 나를 찾지 말게. 자네들과의 인연도 오늘이 마지막이네."
이후 조만식 선생의 신앙은 철저히 성경 중심으로 세워졌다. 특히 그가 즐겨 읽었던 성경은 산상수훈이었고, 이것은 그의 신앙과 사상의 핵심이 되었다. 그는 예수님의 고결한 정신에 몰입해 들어갔고, 젊은이들에게도 그것을 늘 강조했다. “예수님이 인자로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교훈은 눈물과 땀과 피다. 이 세 가지는 동정과 사랑, 노력, 희생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것을 본받아서 민족을 사랑하며, 나라를 위해 땀 흘려 일해야 하며, 최후에 가서는 나라를 위해 희생할 수 있는 각오를 가져야 한다." 그의 애국 및 구국 운동에는 기독교 정신이 깊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만식 선생은 41세(1923)에 산정현교회 장로가 되었다. 당시 그는 오산학교 교장, 평양 YMCA총무 등을 거치면서 이미 평양 사회에서 존경받는 유력한 인사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교회 봉사를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고, 직분에 충성하면서 섬김의 본을 보여주었다.
사회적 명망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서도 모든 공예배 시간을 철저하게 구별하여 지켰고, 주일 아침이면 일찍부터 나와 교인들을 영접하였다. 예배가 끝나면 예배당을 정리하고, 화장실까지 돌아다니면서 청소를 담당하곤 했다. 사비를 털어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교인들과 이웃을 찾아 구제하는 일에도 힘썼다.
고아와 과부들을 돌보았고, 형편이 어려워 공부하지 못하는 가정에는 장학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어려운 이웃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심지어 부인이 어렵게 만들어 준 명주 이불을 거지에게 갖다 주기도 했고, 어떤 때는 두루마기를 벗어주기도 했다.
조만식 선생이 장로로서 봉사하는 모습을 목격한 황성수는 이렇게 증언한다. “조만식 장로는 언제나 맨 앞자리에 앉아 계신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선친 황보익 목사께서는 어린 나에게 그분이 민족의 영도자요, 위대한 기독교지도자요, 백성의 모범이라고 일러 주셨습니다. … 당회에서는 별로 말씀하신 일이 없으셨으나 그가 앉아계신 것만으로도 그리고 간혹 무게 있는 발언을 하심으로 그의 인격에서 나오는 감화와 위력에 의하여 당회는 일치단결하여 바른 결정을 하며 교인들을 감독, 선도하였습니다."
조만식 선생은 영적, 도덕적 권위를 가진 신뢰할 수 있는 지도자였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처럼 풍성한 유산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그와 같은 지도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교회의 지도자였으며, 동시에 한국사회를 대표하는 민족의 지도자이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 한국교회에는 예전에 비해 그와 같은 지도자들이 너무 희귀해진 것 같다. 그런 연유가 하나님과 사람에게 몹쓸 짓하는 자칭 지도자들이 그런 자리들을 대신 채우고 있기 때문은 아닌지? 아니면 본(本)으로써 섬기도록 부름 받은 자들이 본연의 자리에서 이탈해 갔기 때문에 초래된 것은 아닌지? 이제 주님의 거룩한 땅을 이전투구(泥田鬪狗)의 장으로 만들어 사사로운 탐욕을 채우고자 하는 자들을 가려내야 할 때인 것 같다. 그래서 참된 영적, 도덕적 권위를 가진 지도자들이 세워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