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명 헌혈로 살아나 50년 만에 보은”

선천적 심장 기형으로 수술 때까지 살아남은게 기적 당시 달려왔던 학우들과 집도의 초청해 감사의 자리

2025-11-19     남원준

1975년 심장수술, 서울신대 75학번 윤상희 목사
윤상희·길민화 목사의 감사는 50년 전 헌혈로 이어진 생명이 다시 사랑으로 흘러간 이야기다. 고난을 믿음으로 해석하고 받은 은혜를 전도로 되갚은 두 사람의 삶은, 감사가 말이 아닌 삶으로 완성되는 신앙의 고백임을 보여준다.

윤상희 목사 부부와 희년모임에 참석자 단체사진

“1975년 제가 심장 수술을 받을 때 30여 명의 동기와 선후배의 헌혈로 살 수 있었습니다. 많이 늦었지만 이제라도 만나 뵙고 따스한 손을 꼭 잡고 싶습니다.”

50년 전 받은 사랑의 빚을 갚겠다며 윤상희·길민화 목사가 지난 11월 6일 서울 강남의 한 식당에서 은인들을 초청해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이날 모임에는 고제민 김창배 김춘겸 문정섭 박관희 박상구 성락희 안막 이창용 정락유 정재우 정한교 정헌교 조병두 목사(가나다순) 등 서울신대 75학번 동기 목사들이 함께했다. 윤 목사의 심장 수술을 집도한 조범구 박사와 한국심장재단 관계자들도 참석해 기쁨을 나눴다.

윤상희 목사는 “저를 위해 수술해 주신 선생님과 헌혈과 기도를 해주신 동기들을 생각하며 그 은혜를 어떻게 갚을까 고민했는데, 오늘 작게나마 인사를 드리게 되어 행복하다”고 말했다.

사회를 맡은 아내 길민화 목사는 신학교 시절 응원단장 출신답게 힘찬 목소리로 참석자들을 차례로 소개하며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중학생 땐 자살 시도하기도
윤상희 목사는 태어날 때부터 선천성 심장기형인 ‘활로씨 사징’을 앓고 있었다. 청색증을 동반하는 ‘활로씨 사징’은 혈액이 폐순환을 담당하는 우심방과 우심실, 폐동맥 쪽으로 잘 가지 못해서 폐순환이 적절하게 이루어지지 못하거나, 협착이나 폐쇄가 발생해 산소포화도가 떨어지면서 입술과 손끝이 파래지는 증상이다.

윤상희 길민화 목사 부부

 

선천성 심장병 환자로 태어난 윤 목사는 자라면서 얼굴과 손발톱이 새파랗고 길을 걷다가도 숨이 차서 수시로 주저앉았다. 중학교 2학년 때까지 교회를 다니지 않았던 윤 목사는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 자살까지 기도했다. 심장병을 앓고 있어 체육시간마다 교실에 남아있던 그를 본 체육선생이 꾀를 부리는 것으로 오해해 그를 끌어내어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인정사정없이 두들겨 팬 것이다.

사춘기 소년이었던 윤 목사는 공개적으로 심한 모욕과 구타를 당한 것을 비관해 자취방에 돌아가 다량의 수면제를 삼켰다. 잠자는 듯이 편안히 죽기를 기대했지만 정신이 맑아지면서 복통이 찾아오고 결국 먹은 약을 다 토해냈다. 

토해낸 약을 다시 입안에 우겨 넣었지만 재차 구토를 했다. 죽으려 해도 죽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댕그렁 댕그렁’ 하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자신도 모르게 어떤 힘에 이끌려 종소리가 나는 곳으로 한참을 걸어간 그는 교회를 발견하고 조용히 안으로 들어갔다. 그 교회의 목사님은 사도행전 3장의 베드로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인 걸인을 고친 사건을 전하고 있었다. 앉은뱅이가 고침을 받았다는 말씀은 그에게 충격과 희망으로 다가왔다.

낮에 학교에서 수모를 당해 자살하려고 했던 일을 떠올리며 한참을 서럽게 울고 있는데 목사님이 다가와 윤 목사를 토닥이며 자초지종을 물었다. 윤 목사의 자취방을 찾아간 그 목사님은 토사물을 다 닦아주고 윤 목사를 위해 간절히 기도해 주었다. 그 일을 계기로 윤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고, 목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신학교 교수 도움으로 심장병 수술
시간이 흘러 그는 서울신대에 입학했다. 어느날 선교사로 한국에 와 있던 미국인 교수가 그를 불렀다. 자신도 선천성 심장병 환자였는데 수술 후 건강을 회복하여 선교사로 헌신하게 되었다며 윤 목사가 세브란스병원에서 심장 정밀 검사를 받도록 도와주었다. 당시 한국의 의학기술은 윤 목사와 같은 기형심장 수술이 막 가능해진 시점이었다.

윤 목사가 심장 수술을 한다는 사실이 교내에 전해지자 학교 전체가 중보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채플 시간뿐 아니라 매 수업 전에도 수술의 성공을 위해 기도를 드렸다.
윤상희 목사의 심장 수술은 당시 국내에서 선천성 기형심장 수술 분야의 개척자 조범구 박사가 맡았다. 그는 세브란스병원장과 한국심장재단 이사장을 역임하며 심장병 환자들을 살리는 일에 평생을 바친 인물이다.

조 박사는 자신이 수술을 집도한 윤 목사가 지금까지 건강하게 생존해 있다는 사실이 기적이라고 말한다. 선천성 심장기형인 ‘활로씨 사징’으로 수술을 받던 22세까지 생존한 것도 기적이고, 열악한 의료 여건에서 1975년 수술에 성공한 것도, 40년 후 62세에 미국에서 폐동맥 인공판막 수술에 성공한 것 등 모든 것이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한다.

특히 조 박사는 윤 목사의 심장 수술 당시 폐동맥 혈관이 좁아 자체적으로 생성된 부행 혈관을 제거했는데, 당시의 국내 의학계는 잘 모르던 수술이었다. 부행 혈관을 그대로 두었다면 심장 수술을 받은 것이 헛수고가 될 수 있었다. 조 박사가 미국에서 선진 수술법을 배우기 전이었지만 의사의 예리한 감각과 신속한 판단이 윤 목사의 생명을 구한 것이다.

윤 목사의 심장 수술을 앞두고 서울신대 총학생회와 원우회가 나서서 학우들에게 헌혈을 요청했다. 자발적으로 헌혈에 동참한 A형과 O형인 학생 35명이 세브란스병원을 찾아왔다. 병원 측은 인원이 너무 많다며 건강한 사람부터 추린 후 10명은 돌려보냈다.

윤 목사의 수술 날 금식기도 하는 교수와 학생도 많았다. 그날 교수와 학생들이 병원을 찾아와 윤 목사를 위해 기도했는데, 그중에 아내 길민화 목사도 있었다.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난 후 윤 목사의 가족과 친구들이 모두 저녁을 먹으러 간 사이 혼자 남아있던 길 목사가 얼떨결에 윤 목사의 보호자가 되었다. 수술실에서 막 나온 윤 목사를 실은 침대를 중환자실까지 밀고 가 그를 간호했다.

윤상희 목사 부부의 몽골사역

그 후에도 윤 목사가 회복할 때까지 병원을 자주 드나들며 간호를 하다가 평생의 보호자가 되기로 했다. 윤 목사가 앞으로 얼마나 살지 알 수 없었지만 길 목사는 이미 마음속으로 굳은 결심을 한 상태였다.

목회 은퇴 후 전도사역 매진 
길민화 목사는 수술실에 나온 윤 목사의 창백한 모습이 한동안 트라우마가 되어 죽음에 대한 공포가 생겼다. 이후에도 교회 개척으로 인한 삶의 어려움과 여섯 살 딸의 전신화상 사고 등 시험과 환난이 찾아왔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 가운데 기도하던 길 목사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던 믿음을 묵상하며, 남편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교회에 대한 걱정도, 화상 입은 딸에 대한 염려도 마음속으로 사라지고 하나님이 더 좋게 하실 거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윤 목사의 수술 후 50년이 흐르도록 건강한 삶을 이어가고 있는 것도 감사하지만, 두 사람에게서 삼남매뿐 아니라 건강한 11명의 손주들이 태어나는 축복도 받았다. 새 생명을 얻은 윤상희·길민화 목사는 자신들의 삶이 심장병 어린이들에게 희망이 되게 해달라고 오랜 세월 동안 기도했다. 실제로 미국에서 목회를 은퇴한 뒤 귀국 후 매주 신촌 세브란스병원을 찾아 심장병 어린이와 그 가족들에게 복음과 희망을 전하고 있다.

여름에는 석 달간 길 목사의 동생이 평신도 선교사로 사역 중인 몽골에 머무르며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말씀 집회 사역도 펼치고 있다. 윤 목사 부부는 “2025년은 새 생명을 얻고 희년이 되는 해”라며 “전도자로 일생을 마친 후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고백을 하고 싶다”는 소원을 내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