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폐 아들과 함께한 35년, 주님이 예비한 천국의 길”

안성 온누리교회 김을순 권사 “절망의 문에서 감사의 문으로” 아이 통해 하나님 맞이하고 시 장애인부모회 회장 맡아 청년 바우처 사업 정착시켜 30년전 일도 기억하는 아들 성경구절 물으면 줄줄 암송 꼼꼼함도 주가 주신 달란트

2025-11-12     김준수

“감사는 상황이 좋아서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믿음에서 시작됩니다.”

자폐를 가진 아들을 30여 년간 돌보며 신앙으로 삶을 지탱해온 김을순 권사(안성 온누리교회·61세)는 담담히 말했다. 그의 인생은 겉으로 보면 고난의 연속으로 보이지만, 그 속은 감사의 제목을 발견해온 신앙의 여정이었다.

김을순 권사의 아들 김종혁 씨(35세)는 세 살이던 1993년 ‘반응성 애착장애’라는 진단을 받았다. 김 권사는 “당시엔 ‘자폐’라는 말을 부모에게 쉽게 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의사 선생님이 ‘이 아이는 평생 돌봐야 할 아이’라고 말했을 때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고 고백했다. 

“종혁이가 어렸을 때는 워낙 산만하고, 잠깐 신경을 못 쓰면 사라지곤 해서 무척 힘들었어요. 파출소에서 연락이 와서 찾으러 갈 때도 있었고, 언제 한번은 8월에 가족이 다 같이 해운대에 놀러 갔는데, 그 많은 인파 중에 아이가 사라진 거예요. 몇 시간을 찾았는데 만나지 못하고, 주차장에 갔더니 아빠 차 앞에 서 있었어요. 기억력이 좋으니까 아빠 차를 잊어버리지 않고 그 앞에 있었던 거예요.” 

그는 “갓 난 딸을 떼어놓고 신촌 이화여대 언어청각센터를 오가며 40분 수업을 위해 왕복 세 시간을 다녔다. 그때는 눈물로만 살았다”고 회상했다. “모유를 먹어야 하는 딸아이를 떼어놓고 서울로 병원을 다니니까 언젠가 ‘나도 오빠처럼 장애인으로 태어났으면 좋겠다’는 하소연을 하더라고요. 둘째가 어릴 때 받아야 할 사랑을 많이 못 받았죠.”

김 권사는 가족력이 있는 신장질환을  안고 살지만, 그마저도 감사의 제목으로 고백한다. 그는 “남매 넷 모두 신장질환을 앓고 있는데, 저를 제외한 오빠들과 동생은 이미 신장이식을 받거나 투석 중”이라고 설명했다. 다행히 김 권사는 정상 수치를 유지하고 있어 신장이식이나 투석을 받지 않아도 되는 상태다.

“아들을 돌보려면 제가 먼저 건강해야 하잖아요. 지금까지 버티게 해주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예요.” 김 권사는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아들이 열어준 교회의 문

김 권사가 교회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98년이었다. 아들의 특수학교 교사를 통해 처음으로 안성 온누리교회에 가게됐다.

“그 인연으로 처음 예배를 드렸어요. 낯설었지만, 이상하게도 아이는 예배를 너무 좋아했어요. 주일 아침이면 저보다 먼저 일어나 성경책을 챙기더라고요. 그때 ‘하나님이 이 아이를 더 사랑하시는구나’ 느꼈죠.”

예배 시간에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던 아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유아실에서만 머물던 아이가 어느 날부터 예배당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고, 지금은 1시간 넘게 예배를 드릴 만큼 성장했다. 김 권사는 “하나님이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일하신 것”이라고 고백했다.

김권사는 “아들이 나보다 더 신앙이 좋다”며 미소 지었다. “주일이면 새벽같이 일어나 자기 성경책과 제 성경책을 문 앞에 놓아요. 제가 깜빡하고 두고 가면 ‘가져와야 한다’며 챙겨주죠. 그 모습이 제 신앙의 교과서예요.”

김 권사는 신앙 초기에 교회 공동체의 따뜻한 사랑이 큰 힘이 되었다고 말했다. 남편이 신앙이 없었기에 홀로 아들을 데리고 교회에 나가는 일조차 쉽지 않았지만, 교회 안에서 그는 예상치 못한 위로를 받았다. 

그는 “혼자 감당하기 벅찼던 시간들이었지만, 교회 청년들이 아들을 데리고 산에도 가고, 수영장에도 함께 가 주었다”며 “그분들이 아니었다면 우리 아이에게 ‘세상은 따뜻하다’는 기억이 남지 않았을 것”이라고 회상했다.

이어 “돌이켜보면 우리 아들이 아니었으면, 저는 교회를 몰랐을 것”이라며 “하나님은 절망의 문을 감사의 문으로 바꾸셨다”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서 “교회는 나의 두 번째 가족”이라며 “구역 식구들이 늘 곁에서 기도해 주고, 어려울 때 함께 울어주었다. 하나님은 결국 사람을 통해 위로하신다는 사실을 교회를 통해 배웠다”고 고백했다.

장애인부모회로 섬김의 자리로

김 권사는 안성시장애인부모회 회장을 역임하며 지역의 장애인 돌봄 체계도 정비했다. 그는 “자폐 아이들은 스스로 권리를 주장하기 어려워 부모가 대신 나서야 한다”며 “그 일을 하나님이 제게 맡기셨다”고 말했다.

회장으로 섬기던 시절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발달장애인 주간활동서비스’ 바우처 사업을 안성 지역에 도입했고, 성인 발달장애인을 위한 낮 활동 프로그램을 정착시키면서 지역사회의 돌봄 기반을 확장했다. 

“그 프로그램은 외부 활동 30%가 의무예요. 교실에만 머무는 게 아니라 세상 속으로 나아가 배우는 과정이에요. 그걸 보며 ‘하나님이 나를 이 일에 쓰시려고 인도하셨구나’ 생각했죠.”

김 권사의 아들은 현재 안성의 한 직장에서 장애인 의무고용으로 근무하고 있다. 하루 4시간씩 운동을 하며 급여를 받고, 월세와 관리비를 스스로 감당하고 있다. 김 권사는 “아이가 아빠에게 용돈을 드릴 때마다 눈물이 난다”며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감사의 고백을 전했다.

그는 아들의 탁월한 기억력과 꼼꼼함을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달란트로 여긴다. 

“30년 전 일도 날짜와 장소까지 또렷하게 기억해요. 예배 중에 ‘요한복음 몇 장 몇 절’이라고 하면 즉시 입에서 튀어나와요. 이런 모습을 보면 하나님이 얼마나 세밀하게 아이를 빚으셨는지 느껴집니다.”

‘하나님의 시간표’로 살아가는 아이들
김 권사는 ‘감사는 기다림의 신앙’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살다 보면 위기가 여러 번 찾아오지만,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보호하셨다”며 “세 번의 교통사고를 겪었지만 아이와 함께 있을 땐 한 번도 다친 적이 없다. 그것이 하나님의 보호하심이었다”고 고백했다. 

이어 “감사는 조건이 아니라 관계에서 비롯된다”며 “힘들고 외로웠던 시간 속에서도 하나님과의 관계는 더 깊어졌다. 사랑하며 감사하면 결국 모든 것이 은혜로 바뀐다”고 덧붙였다.

지난 9월 21일 권사로 임직을 받은 그는 “앞에 나서는 성격은 아니지만 순종하는 마음으로 직분을 받았다”며 “하나님이 작은 자를 쓰신다고 하셨다. 이제는 감사의 삶으로 복음을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아직 신앙이 없는 남편을 위해서도 매일 기도하고 있다. 김 권사는 “감사로 살아온 제 삶이 남편에게 복음이 되길 바라고 있다. 언젠가 하나님께서 그 마음도 여실 거라 믿는다”고 말했다.

김 권사는 “한 영화에서 ‘장애인은 오랫동안 사랑받을 사람들’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정말 마음에 와 닿았다”며 “이 아이들은 세상의 시간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표로 살아가는 존재다. 그래서 더 오래, 더 깊이 사랑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김 권사는 감사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감사는 조건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고난은 허락하지 않으세요. 지금 힘든 이들도 반드시 감사할 날이 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