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톡톡(1469호)
종의 설교학
“제 수업의 궁극적인 목적은 설교자를 기르는 것입니다.”
필자가 신학대학원 설교학개론 수업을 할 때마다 첫 시간에 늘 하는 말이다. 설교란 기술이 아니라 사명이며, 설교하는 이유는 스스로의 영광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명에 순종하기 위해서임을 강조하기 위해 나누는 말이다. 듣기에 거북할 수 있는 줄 알면서도 굳이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왜곡된 설교에 대한 욕망을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설교를 잘 하고 싶어서 설교학을 배우려 한다. 그런데 왜 설교를 잘 하고 싶은가? 설교를 잘 해서 무엇을 이루려 하는 것인가? 이런 질문에 대해 제대로 된 답을 가지고 있어야 설교만 잘 하는 설교기술자로 남지 않을 수 있다. 대부분 이에 대한 성경적이며 건강한 신학에 기초한 답을 가지고 있으리라 믿지만, 다시 한번 지면을 통해 이에 대한 답을 하고자 한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며, 설교자는 그 일을 위해 부름 받은 종이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설교와 설교자에 대한 정의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 1절에서 스스로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칭한다. 야고보와 베드로 역시 스스로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칭한다. (약 1:1, 벧후 1:1) 바울은 로마서 1장 1절만 아니라 여러 곳에서 반복적으로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종이라 칭하며(빌 1:1, 골 1:23, 딛 1:1) 에베소서 3장 7절에서는 복음을 위하여 종이 되었다고 말한다.
이는 설교라는 사역을 감당하는 직임이 곧 종의 직임을 공언하는 것이다. 이것이 강조되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 돌려져야 마땅한 영광과 존경이 설교자들에게 돌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존 스토트는 종(servant)으로서의 설교자를 강하게 주장한다. 그는 설교자를 칭송하는 회중, 그러한 칭송을 은근히 기대하는 설교자 모두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자들이라고 단언한다. 스토트가 말한 바와 같이 설교자는 하나님의 종이며 사람들의 종이다. 사람들을 섬기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도록 보내심을 받은 이들이 곧 설교자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성(apostleship)은 교권의 근거가 아니라 섬김(servantship)이라는 사명이 계승됨을 칭하는 것이라 이해되어야 한다. 설교자들은 보내신 이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 존재 이유인 사역자(使役者)들이지 이익을 취하고 지경을 넓히는데 몰두하는 사업가(事業家)들이 아니다.
설교를 잘 하려는 이유는 목회에서 생존하고 성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설교자를 부르시고 보내신 하나님의 뜻, 곧 세상을 죄로부터 구원하는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이다.
주인의 말을 전하라고 보내진 심부름꾼이 무슨 말인지 기억하지도 못하고 이해가 부족하여 자기 생각대로 메시지를 왜곡하거나 얼버무리면 안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보냄받은 설교자들은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 들은 바를 명료하게 전하려 애써야 하는 것이다.
주인의 말을 전한 종이 상대에게 후한 상을 받을 수도 있고 가혹한 핍박을 받을 수도 있으나, 그가 받을 궁극적 상벌은 보내신 분으로부터 받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설교자는 말씀을 전하고 청중으로부터 긍정적 피드백과 부정적 피드백 모두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마땅히 자기가 받을 상벌이라고 여기면 안되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받을지에 집중해야 한다.
청중으로부터의 피드백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것임을 기억하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사명을 감당하는 중에 겪고 지나가는 일일 뿐라 여겨야 한다. 청중에게 귀를 기울이고 사랑으로 그들을 돌보고 섬기는 것은 그들에게 어떤 이익이나 인기를 얻기 위해서도 아니며 그들의 눈치를 보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이 섬기라고 보낸 이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설교자의 성장은 설교기술을 다양하고 완벽하게 구비하는 것이라기보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는 종의 마음을 키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