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톡톡(1463호)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설교 ②

2025-08-20     정재웅 교수(서울신대 설교학))
                             정재웅 교수

진정한 의미에서 설교는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성서적 증거를 보아도, 교회사 속 역사적 증거를 보아도 칼빈과 칼 바르트, 루돌프 보렌 등 신학자들의 증거를 보아도, 실제적으로 경험하는 증거를 보아도 참된 설교는 참으로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설교가 한 사람의 신학적 지식이나 견해를 전하는 종교적 강론이라면 성령과 무관할 수 있다. 그러나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계시의 사건이라면 성령을 떠나서는 성립할 수 없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역사하셔야 설교자는 성경의 문자 너머에 감취인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역사하셔야 전하는 자와 듣는 자가 함께 복음의 은혜 속에 들어갈 수 있다. 

참 예언자들은 성령에 감동을 입어 말씀을 전하였으나 거짓 예언자들은 성령과 관계없이 청중이 듣고 싶어하는 메시지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전하였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누차 복음을 전하라고 명하시며 한 번도 설교학을 가르치신 적이 없으셨다.

대신 성령을 불어 넣어 주시고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요 20:22) 오순절 성령 강림을 경험하고 나서야 수제자 베드로가 처음으로 설교할 수 있었다.(행 2:14) 스데반도 바울도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서 능력있게 설교할 수 있었다.(행 7:55, 19:8-20)

로이드 존스가 말한 바와 같이 설교는 성령의 불이 붙은 논리여야 한다. 성령 없는 논리는 메마른 사변에 불과하다. 성령 없는 설교는 설득은 할지라도 영혼을 변화시킬 수 없다. 오늘날 클릭 한번만 하면 손 안에 수많은 설교를 들을 수 있을만큼 설교가 범람하고 있지만, 홍수 속 마실 물이 없는 것처럼 진정한 설교를 찾기가 힘든 이유는 성령 없이 설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성령께서 설교의 전 과정에 역사하시기를 간구해야 한다. 

먼저 성령께서 설교자 자신에게 은혜 베푸시기를 구하라. 설교와 관련하여 성령께서 하시는 가장 중요한 사역은 한 사람의 설교자를 만드시는 것이다. 설교자는 컴퓨터 앞에 앉기 전에 먼저 성령 앞에 무릎 꿇어야 한다. 설교자는 성령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령께 복종하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

구변과 지식으로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가 성령 앞에 무릎꿇고 철저히 자신을 내려놓고 성령께서 자신을 지배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설교자가 해야할 기도는 단순히 설교를 잘 하게 도와달라거나 설교 아이디어를 좀 알려달라는 것이 아니다. 성령께서 설교자를 다루시도록, 성령께서 그를 빚으시도록 내어드리는 기도를 해야 한다. 

다음으로 성령께서 설교자의 눈을 여시기를 구하라. 성경을 보는 눈을 여시고 세상을 보는 눈을 열어 달라고, 지혜와 계시의 영을 부어 달라고 기도하라. 설교자가 성령에 충만할 때 말씀이 새롭게 보인다. 익숙하던 본문 속 활자가 살아 움직이는 역사가 일어난다.

현대 설교학자들은 설교자가 본문 속 세계를 여행하고 그 경험을 증언해야 한다고 말한다. 단순히 본문을 조목조목 따져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본문을 읽을 때 모든 인물들이 살아 움직이는 세계가 열리고 그 세계를 경험한 것을 가지고 설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해서 해석학적 경험을 하는 것을 넘어서는 것이다. 성령께서 설교자를 본문 속으로 끌고 들어가실 때, 설교자는 본문을 대상이 아닌 현실로 경험하게 된다. 그러한 경험이 칼빈이 말하는 성령의 조명이다. 

성령은 성도들을 보는 눈도 바꾸어 놓으신다. 설교자의 기질이나 성향에 따라 편향적으로 보던 사람도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게 된다. 정죄의 대상이나 사역을 위해 필요한 일꾼이 아니라 함께 한 성령을 받은 동역자요 그리스도인으로서 성도들을 존중하고 긍휼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청중들을 아무 생각 없이 회중석에 앉은 교화나 계몽의 대상이 아닌 갈급한 심령으로 은혜를 사모하는 영적 존재들로 보게 된다. 성령을 받으라. 설교가 바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