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1462호)
너희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져라 여인을 살린 주님의 강렬한 여섯마디 교회가 던지는 메시지는 타격감 없고 호소력도 없는 가련한 울림은 아닌가
1954년. 어니스트 밀러 헤밍웨이는(Ernest Miller Hemingway)는 『노인과 바다(1952)』라는 책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그뿐이던가? 1953년엔 퓨리처상도 수상했다. 당시 그가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을 쯤에, 신문기자들이(헤밍웨이도 신문기자출신이다) 그를 조롱하듯 질문을 했다. “당신이 진정 세계의 대문호라면, 6단어만 사용해서 여기 있는 기자들을 울려봐라” 그는 기분이 나쁠수도 있지만, 올라오는 감정을 거세하고 식당에 있는 냅킨에 6단어를 썼다.
For sale: baby shoes, never worn. (판매 중 : 아기신발, 한번도 신지 않음.)
무슨 뜻일까? 단어의 자간과 행간 사이에 있는 의미들을 사색해보라. 번역한즉, 아기가 태어났는데, 한번도 신발을 신지 못하고 죽은 것이다. 도대체 그건 어떤 감정일까? 그건 6,000단어를 사용한다고 해도, 표현할수록 초라해질 수밖에 없으리라. 그런데, 그런 아기의 신발을 판매할 정도로 그의 부모의 현실은 가난한 것이다.
그러니 이 부모가 가진 사연은 어떤 문법으로 표현할수 있겠는가? 결국 6단어로 이루어진, 단 하나의 문장으로 그곳에 있었던 대부분의 기자들은 울었다. 또 울지 않은 기자들은 스스로 본인이 기자라면 응당 가져야할 기초적인 인간성도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게 된 것이다. 헤밍웨이는 그후, 진지하게 ‘For sale:baby shoes, never worn.’라는 제목으로 소설까지 쓰게된다.
그는 문장이 가지는 힘을 알았고, 문학이 가지는 권력을 알았다. 그렇기에 한 단어라도, 한 문장이라도, 소중하게 신중하게 표현한 것이다.
2025년. 교회란 무엇인가? 또 무엇이 교회인가? 적어도 이 글을 읽은 사람이라면, 목회자라는 문법을 가진 이들이다. 그런 우리에게 교회는 모호함과 애매함의 경계에 있는 두루뭉술한, 비겁한 대답을 가진 이들이 아니다. 우리는 정확한 대답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다.
왜냐하면 우리만큼 성서의 권력과 교회의 힘을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 어떤 단어로 메시지를 전해야 할까? 혹시,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는 이 세상에 타격감도 호소력도 없는, 가련한 메시지는 아닌가?
입추(立秋)엔 지렁이를 질투한다. 지렁이는 잎, 풀, 흙 등 버려진 유기물을 제 무게만큼 먹는다. 결국, 가장 곱고 기름진 흙으로 토해낸다. 그건 정화(淨化)하는 힘이다. 목회자로서 나의 언어는 이런 지렁이를 닮을 수 있을까. 우리 시대에 주어진 어지러움과 어려움을, 내 속으로 끌어들여 정화된 언어, 청결한 메시지를 전할수 있을까? 배설물처럼 감정을 토해내는건, 배설물 같은 언어일뿐이다.
그날 예수님도 스스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며 6단어로 말씀하셨다. ‘ὁ ἀναμάρτητος ὑμῶν πρῶτος βαλέτω λίθον(요8:7)’ 번역하면,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져라’. 이것은 예수님의 6단어였다. 예수님의 말 그릇은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날의 선명한 울림은 양심에 가책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고(요8:9), 누군가를 죽이려고 가지고 온 돌맹이를 버리게 하기에 충분했고(요8:10), 한 여자를 살리기에 충분했다(요8:11)
8월. 이 시간의 교회는 무엇을 준비하는가? 이 시간 교회가 준비할 것은 분주한 행사를 넘어선 섬세한 메시지가 아닐까.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이의 마음을 동경한 적이 있었다.
아름다워지겠다고 결심해 본적이 언제인가. 고결함을 잃지 않겠다고 다짐해 본적인 언제인가. 타인의 슬픔을 나의 아픔으로 여기며, 살점을 삶 점으로 덧 바느질 치며, 목 놓아 운적은 언제인가. 우리가 사랑했던 그 시절, 모두 어디에 있는가. 선지자를 동경한다면 광야로 갈 수밖에 없다.
우리의 신앙은 선지자들 같이 비범해 질 수 있고, 모든 선지자들의 신앙은 우리처럼 괴로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