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톡톡(1459호)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설교 ①

2025-07-16     정재웅 교수(서울신대 설교학)
                                                        정재웅 교수(서울신대 설교학)

“설교를 잘 하고 싶어서 설교학을 배웠는데 설교가 더 어려워졌다.” 

한 학기 강의를 마칠 즈음에는 학생들에게 종종 듣는 피드백이다. 어쩌면 설교톡톡을 읽는 독자들도 비슷한 생각을 할지 모른다. 그냥 설교하면 쉬운데 따지는게 많고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하는지… “안 그래도 매주 10편 가까이 설교하는 목회자의 부담을 모르는 학자라서 저런 이상적인 소리만 한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혹은 ‘설교는 성령이 역사하시는대로 맡기면 되는 거지 이런 저런 기술을 익힌다고 되는 게 아니야’ 라고 하는 분도 계실 수 있다. 전적으로 동의하는 말씀이다. 설교는 성령이 역사하실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질 수 있다! 아무리 유려한 언어로 설교한다 해도, 성령이 역사하시지 않는 설교는 공허한 인간의 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설교를 듣는 청중은 우리 목사님은 참 설교를 잘하셔라고 평가할지언정 말씀을 듣고 변화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역사하신다면 내용이 다소 모자라는 설교도, 어눌한 발음 때문에 무슨 말 하는지 알아듣기 힘든 설교도, 요점이 무엇인지 파악하기 힘든 횡설수설한 설교도 놀라운 일을 할 수 있다. 

존 웨슬리가 명설교가의 달변을 듣고서가 아니라 이름도 모르는 성도가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그저 읽어 주는 것을 듣고서 회심한 것처럼 성령이 역사하시면 범인(凡人)의 눌변에도 위대한 역사가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돌들로도 소리치게 하실 것이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돌같은 마음도 변화시킬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무엇보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설교가 되도록 간구해야 한다. 

그러나 성령이 역사하신다는 약속이 설교자의 핑계거리가 되어서는 안된다. ‘어차피 설교는 성령께서 역사하셔야 하는 것이니 내일 강단에 올라갔을 때 주시는 말씀을 하면 돼!’ 라며 소홀한 설교 준비를 정당화해서는 안될 것이다. 성령은 설교자가 필요할 때 꺼내 쓰는 요술지팡이가 아니라 설교자가 전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인격이시다. 거룩한 하나님의 영이 맘껏 사용하실 수 있도록 설교자는 생각과 언어, 삶으로 빚어진 그릇을 준비하고 그 입에 말씀을 넣으시도록 크게 벌려야 한다. 

어떤 모양의 그릇이든 온 동네를 다니며 빈 그릇을 모은 과부처럼 설교자는 할 수 있는 한 모든 방법으로 설교를 준비하고, 그 위에 성령께서 기름 부으시기를 믿고 간구해야 할 것이다. 설교자의 불신앙으로 성령을 제한하지 않아야 함과 동시에 설교자의 나태함으로 성령께서 역사하실 그릇을 준비함에 소홀해서도 안된다. 설교를 배우고 익히는 이유가 바로 그런 까닭이다. 

설교가 무엇인지 모르고 할 때 설교가 쉽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런데 설교가 무엇인지 알고 설교를 설교답게 하려면 생각할 거리가 많아지고 준비할 것이 많아진다. 성경본문을 자기 마음대로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본문의 적확한 문법적, 역사적, 문학적, 신학적 의미를 묵상하고,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고, 청중의 삶의 정황 속에서 어떻게 들리는 말씀이 될지 고민하고 지혜를 구해야 한다. 

강단에 올라가서는 담대하게 그러나 청중과 소통하며 지혜롭게 음성과 눈빛과 몸짓으로, 온 몸으로 전하려 애써야 한다. 신실한 설교자는 성령이 역사하시는 설교를 위해 이 모든 과정 속에서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자신의 어리석음과 알면서도 인정하지 않고 돌아서지 않는 죄악된 본성과 끊임없이 씨름한다. 

자신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약속 사이에서 끊임없이 좌절하고 갈등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나아간다. 그런 설교자에게 설교만큼 어렵고 괴로운 것이 없다. 그러나 그런 과정을 겪은 설교자야 말로 성령께서 어떠한 은혜로 그의 설교를 사용하셨는지 알게 될 것이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설교는 쉽게 들리되 쉬이 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