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시론(1457호)
성결 120돌 이정표, 어떤 모습일까 1907년 김상준-정빈 두 전도자의 외침 지구촌 곳곳에 울려 퍼질지 상상했을까 위대한 것 기대하고 위대한 것 시도해야
시간의 흐름 속, 역사의 분기점마다 우리는 이정표를 세운다.
작년 한국에서 열린 제4차 로잔대회(Lausanne IV, 9.22~28, 송도)도 개신교 선교 역사의 이정표였다. 느슨한 연대인 이 운동이 마닐라(1989)와 케이프타운(2010)의 징검다리를 지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반세기 동안 명성과 생명을 지속하다가 다시금 50년 만에 우리나라에서 개최되었던 이유는 뭘까? 스위스 로잔의 첫 대회(1974)가 너무도 명확한 이정표였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 신학계는 혼란했고, 선교계는 방향을 잃었다. 기독교는 세속화된 서구 사회 속에서 영향력을 잃어갔고, 젊은이들은 기독교를 구닥다리로 여겼다. 이런 때 로잔은 교회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빌리 그래함은 “세계 많은 나라를 여행하며 수많은 훌륭한 지도자들을 만났으나, 그들이 서로를 모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며 연합의 필요를 제기했고, 그래서 로잔은 지금까지 세계 복음주의권의 연대와 협력의 플랫폼이 되고 있다.
존 스토트는 그의 메시지 ‘현대 세계에서의 기독교 선교’에서 “복음은 회심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책임을 동반”해야 하며, “전도와 사회적 책임은 두 날개와 같다. 하나로는 날 수 없다”며 둘 중 그 어느 것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복음전도와 회심의 중요성을 확고히 하면서도, 사회적 책임과의 균형을 제시했다.
랄프 윈터는 ‘새 마게도냐’라는 제목의 메시지를 통해 국가 단위에서 종족 단위의 성경적 선교로 방향 전환을 제시했다. 선교 방향을 마게도냐로 이끈 바울의 환상처럼 이후 개신교 선교운동의 방향은 미전도종족 선교로 전환되었고, 새로운 도전 앞에 선교운동은 불일 듯 일어났다. 이렇게 로잔은 ‘복음주의의 연대의 필요성’, ‘온전한 복음’과 ‘미전도종족 선교 방향’에 대한 확신을 중심으로 복음주의권의 분명한 이정표가 되었다.
성결교회도 그랬다. 이미 장로교, 감리교가 자리잡은 땅에서 복음전도관을 세워 힘있게 복음을 전하게 된 이유는 ‘사중복음’에 대한 확신 때문이었다. 만주 용정에서 박기래, 박장환, 한치국 세 사람을 주축으로 따로 모임을 시작하고, 교단에 사역자를 요청해 나라 밖 만주 용정에 최초의 성결교회를 설립(1925.3.25)하게 된 이유도 ‘사중복음’에 대한 확신과 이를 바탕으로 한 성결교회 영성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다.
또 하나님은 6·25전쟁이라는 극심한 고난 속에서도 교단을 보전하셨고, 뭉쳐 재건하게 하셨으며, 부흥의 길로 이끄셨다. 우리는 그 은혜에 응답해, 어려운 가운데서도 희년기념식(1957.5.28, 서울신대)을 갖고 기념관 건립과 출판사업을 추진하며 희년의 이정표를 세웠다.
교단 창립 60주년에는 한국, 일본, 대만 성결교회를 중심으로 아시아-태평양 성결교회연맹을 창립(1967)하는 일에 헌신했다. 70주년에는 성장의 은혜에 응답하여 안으로는 총회본부 건립, 밖으로는 해외선교위원회 창립이라는 이정표를 세웠다. 이후로도 10년 단위로 교단 역사의 분기점마다 이정표를 세우며 의미 있는 시도를 계속했다.
교단 창립 80주년 기념대회(1987)와 제1회 세계선교대회(1988), 교단 창립 90주년 기념대회와 국내선교위원회 조직(1998), 교단 창립 100주년 기념대회 및 선교사대회(2007), 교단 선교 40주년 기념대회(2017)가 바로 그 이정표들이다.
올해는 나라 밖 용정에 최초로 교회를 설립한 지 100년이고, 교단 창립 120주년을 목전에 두고 있다. 로잔의 첫 세 사람은 그들이 세운 이정표가 50년 후에도 지속되며 이리 큰 선교의 물결을 이룰지 알았을까?
1907년 김상준, 정빈 두 전도자는 그들의 전도의 외침이 기성과 예성의 주춧돌이 되고, 전 세계 선교지에 메아리치며 지속될 줄 상상이나 했을까? 지금 기독교 교세는 약해지고, 선교 환경도 예상할 수 없이 불투명하다.
하지만 우리 교단 역사의 분기점이 다시금 다가오고 있다. 어떤 모습의 이정표가 세워질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심지 않으면 거둘 열매가 없다는 것이다. 또 예수님 주신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에서처럼 상상 못할 위대한 결과가 될 수도 있다. 새 이정표를 세워야 할 이때에 윌리엄 케리의 도전이 기억난다.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것을 기대하고, 위대한 것을 시도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