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톡톡(1457호)

문어체와 구어체 황금비를 찾으라

2025-07-02     정재웅 교수(서울신대 설교학)
                                                                  (정재웅 교수)

들리는 설교를 고민하는 설교자는 글쓰기로 씨름한다. 쉽고 간결하면서도 청중의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는 설교, 성경 속 증인들의 목소리를 고루한 옛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들리는 살아있는 말씀으로 전달하는 설교, 눈꺼풀이 스스르 감기는 설교가 아니라 눈이 번쩍 뜨이는 흡입력있는 설교를 고민하는 설교자라면 글과의 씨름은 일상이요 운명이다. 그런 씨름이 구체화되어 나타나는 것이 문체(style)이다. 

문체는 말 그대로 스타일이기 때문에 무엇이 좋다 나쁘다 평가하기는 힘들다. 다만 자신의 설교 스타일이 청중에게 잘 들리는 설교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설교자에게 익숙한 말버릇이 청중들에게 불편하게 들린다면 개선할 필요가 있다. 조금 더 청중의 귀를 열어 줄 수 있다면 자신의 스타일을 교정할 필요가 있다. 설교자와 청중 모두가 편안한 말투를 찾을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문어체와 구어체의 황금이다. 

문어체가 일상적인 대화보다는 글을 쓸 때 사용하는 글말이라면, 구어체는 일상적인 대화에서 주로 사용하는 입말이다. ~이다, ~한다, ~했습니다, ~합니다, ~입니다 하는 식으로 마무리되는 문장이 문어체이고, ~해요, ~하죠, ~에요 하는 식으로 끝나는 말이 구어체이다. 글을 읽는 독자를 위한 문체가 문어체이고 말하기 상대 혹은 청자에게 쓰이는 말이 구어체이다.

문어체는 논문이나 보고서, 신문 기사와 같이 조직적이고 논리적인 글에서 쓰이고 구어체는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할 때 자연스러운 감정을 표현하며 활용하는 대화의 언어이다. 

그렇다면 설교에는 문어체가 좋을까 구어체가 좋을까? 사실 이 질문은 적절하지 않다. 문어체나 구어체 모두 설교에서 필요하고 활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구어체로 작성된 설교는 듣기는 편하지만 가볍게 느껴질 수 있고, 문어체로 작성된 설교는 듣기에는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논리와 깊이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설교자와 청중의 관계와 회중의 특성에 따라, 또한 설교 상황에 따라 친밀한 구어체 설교를 선호할 수도 있고 공적 선포의 언어로서 문어체 설교를 선호할 수도 있다. 

김기석 목사의 잘 정돈된 문어체 설교를 들으며 문학적 상상과 신학적 반추의 경험할 수 있다면, 장경동 목사의 맛깔나는 구어체 설교는 이야기 속으로 몰입과 공감으로 이끈다. 설교는 대화와 선포 둘 다의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구어체와 문어체 모두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더 나은 질문은 설교에서 문어체와 구어체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느냐이다. 

어떤 설교도 100% 문어체 혹은 100% 구어체로 된 것은 없다. 문제는 둘을 배합하는 황금비율을 찾는 것이다. 이를 위해 설교자가 어떤 설교를 지향하는지, 청중이 어떤 분들인지,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설교하는지를 고려해야 한다. 

공적 선포를 지향하는 설교자라면 문어체의 비율이 높을 것이고, 친밀한 대화의 설교를 지향하는 설교자라면 구어체의 비율이 높아야 할 것이다. 고등교육을 받은 적이 없고 하루 종일 고된 육체노동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온 청중이 다수인 교회 공동체에서 문어체 설교는 수면제 역할을 할 것이고, 새로운 지적 탐색을 갈망하고 상호존중에 기반한 자율적 사고에 익숙한 청중들에게 “~했어? 그렇지?”하며 툭툭 던지는 구어체 설교는 불쾌함을 자아낼 것이다. 

서너명 앉아서 짧게 드릴 것을 기대한 심방예배에서 30분짜리 문어체 설교를 한다면 다시는 심방초청을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수백 수천명이 모인 주일 공예배나 공적 예배에서 딱딱한 분위기를 깬다며 반말투에 농담조로 구어체 설교를 한다면 무척 부적절하다고 느낄 것이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 사과 같으니라”(잠 25:11)는 말씀처럼 가장 좋은 것은 경우에 맞게 문어체와 구어체를 적절하게 섞어서 말해야 한다. 친밀한 대화가 공적 선포로 이어질 수 있도록, 경우에 합당하며, 청중들에게 가장 잘 들릴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