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톡톡(1454호)
쉽게 전하는 법 ‘성육신적 번역’
쉬운 일상언어로 설교하는 걸 쉽지 않게 느끼는 설교자들에게 성육신적 번역을 소개하고자 한다.
성육신적 번역은 신약학자인 찰스 콕스그로브와 설교학자인 도우 에드거튼이 함께 창안한 방식이다. 일반적으로 번역은 원문의 단어, 문법, 표현을 그대로 살려 최대한 원문에 가깝게 번역하는 직역과 원문의 의미는 유지하면서도 보다 자연스러운 표현을 살리는 의역으로 나뉜다.
직역이 추구하는 바를 형식 일치라고 한다면, 의역이 추구하는 바는 기능적 등가성이라고 할 수 있다. 언어학자 유진 나이다는 형식 일치보다 기능적 등가성을 더 우선하여 의미가 통하는 역동적 번역을 제안했는데 성육신적 번역은 그와 같은 번역이다.
성서 번역의 경우 개역개정판이 직역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면 메시지성경 혹은 쉬운성경 등은 의역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갈라디아서 3장 21-22절 본문을 개역 개정은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고 번역한다.
반면에 메시지성경은 “그렇다면 율법은 약속과 반대되는 것, 곧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의 취지는, 우리 스스로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음을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을 성취하실 때까지 믿음으로 기다림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 것을, 우리 스스로의 노력으로 얻겠다고 종교 체계를 고안해 내는 것이 얼마나 쓸데 없는 짓인지 드러내 보이는 데 있습니다. 율법을 준수해서 우리 안에 생명을 창조할 능력이 있었다면, 우리는 벌써 생명을 얻고도 남았을 것입니다”라고 번역한다.
원문을 살펴보면 개역개정이 형식 일치를 이루고 각 단어와 문법 구조를 최대한 살리고 있지만 문체가 예스러운 비일상적인 것이며 단어들도 신학적 내용을 압축하고 있기에 직관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진 피터슨은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는 구문을 “우리 스스로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음”이 율법의 취지라고 번역한다. 메시지성경의 구문은 헬라어 원문과는 형식적으로 거리가 있지만 개역개정에 비해 한결 이해하기가 수월하다.
성육신적 번역은 메시지성경과 같은 의역을 추구하되 문화적 상황화 혹은 본문의 현대화를 포함한다. 즉, 현재 우리 시대에 본문의 내용은 어떻게 문화적으로 적합하게 표현될 수 있을까를 고려하여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마 21:1-11, 막 11:1-11, 눅 19:28-38)을 어떻게 현대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나귀새끼를 타지도 않거니와 종려나무도 없는데 이를 그대로 말하면 그 의미가 잘 와닿지 않는다.
이렇게 표현하면 어떨까? “새로운 국민적 지도자의 입성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이곳 광화문은 인산인해입니다. 저기 예수님의 모습이 보입니다. 아⋯ 마이바흐 검은색 세단이 아니군요. 털털 거리는 50cc 배달 오토바이를 타고 느릿하게 들어오고 계십니다. 네, 군중들이 경쟁이라도 하듯이 저마다 자기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길에 깔아 레드카펫을 만듭니다. 어떤 이들은 버버리 코트를 벗어서 놓고, 어떤 이들은 무신사 체크롱 코트를 벗어 놓고, 어떤 이들은 거적대기같은 것을 벗어서 놓습니다. 마치 자기가 무엇을 예수를 위해 내 놓았는지 기억해달라는 듯이 말입니다. 수많은 이들이 개나리꽃과 진달래꽃을 꺾어 예수를 환영합니다. 야간이었다면 야광봉이 밤거리를 수놓았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본문을 현대적으로 표현하는 성육신적 번역을 시도해본다면 어렵고 멀게만 느껴지던 성경이 보다 현실적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